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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남산초이스 <짓 – 사자의 언어>

유통기한 짧은 인간을 위로하는 사자들의 말

김지수
212호 2021.12.23
이변이 없는 한, 죽음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까마득한 미래에서야 도래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만 하지. / 유한한 생명을 사랑하기, / 자신의 삶이 그것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걸 끌어안기, /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 (메리 올리버, 「블랙 워터 숲에서」)

이변이 없는 한, 죽음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까마득한 미래에서야 도래한다. 그러니 죽음-이후는 아무도 모를 마지막 이후의 일이다. 모르는 것은 흥미롭기도 두렵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음의 문지방에서 나를 데려갈 초월적 존재에게 나는 기대야 하는가 아니면 그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한국에서는 그 초월적 존재를 ‘저승사자’라 부른다. 서도민요를 하는 추다혜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사자가 된다. 추다혜의 저승사자는 삶의 끝을 선언하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생애를 다정하게 지켜봐 주는 자로, 그렇게 그는 인간사 희로애락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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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말하기 방식

스산한 분위기의 공연장, 상수 한쪽에는 가운데가 뻥 뚫린 거대한 조형물이 놓여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타악기 소리가 공명한 뒤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온다. “사자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찾는 중이다”. 이유는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사자, 혹은 추다혜는 무슨 말을 객석에 전하고 싶은 것일까? 사자는 조형물을 통과하며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리를 낸다. 입장과 퇴장을 몇 차례 반복하고서야 마침내 ‘말’을 한다. 무섭게 조성되어 있던 분위기는 오간 데 없고, 하얀 옷을 입은 사자는 자신이 강림차사라는 사실을 알리는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생에 웃고 사에 눈물지을 뿐, 이제 막 왔고 떠나네”.
추다혜 옆 무용수 둘은 각각 일직사자와 월직사자다. 그들은 발설하지 않는다. 오직 몸만이 그들의 언어다. 줄곧 노래를 부르는 강림차사와는 다르게 그들은 기어 다니고, 뛰고, 춤추고, 몸을 친다. 내레이션의 말을 떠올려보면 일직과 월직의 언어 또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다. 음성언어로 다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위하여 사자들은 자신의 신체를 기꺼이 이용한다.
음성언어의 대체물은 신체뿐만이 아니다. 공연을 지배하는 것은 음악이다. 무대 상수 끝에는 다수의 타악기와 전자음향장치 등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공연에서는 체명악기인 징과 정주의 소리가 두드러진다. 자신의 몸체를 이용해 소리를 내는 악기는 무대 위 무용수들이 몸을 두드려 내는 소리와 한데 어우러진다. 공연에서는 가장 원초적인 소리내기 방식인 몸 혹은 물체 두드리기를 사용하여 인간 생애를 추적한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와 늘 함께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몸’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몸들이 내는 언어’다. 입과 몸으로 내는 언어로 무대가 채워진다.

객석을 향하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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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한 남자가 조형물을 통과한다. 그는 ‘아무개’다. 아무개는 원을 통과한 뒤 아기처럼 기어 다니는데, 사자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개의 눈에는 사자들이 보이지 않지만 꼭 사자들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것처럼 보인다. 강림차사는 아무개의 유년기를 두고 ‘봄’이라 말한다. 그리고 다가온 뜨거운 여름, 아무개는 사춘기를 겪는다. 강림차사는 앉은 아무개의 위에서 마치 꼭두각시를 이리저리 조종하듯 손을 바쁘게 움직인다.
아무개는 조금 더 자라서 청년이 된다. ‘시간 밖에 가진 게 없어서 미련한 청춘’인 아무개는 양 상·하수에 앉은 사자들을 향해 계속해서 돌진하고, 외면당하고, 부딪힌다. 사자들이 내는 반복적인 손뼉 소리는 아무개의 좌절을 소리로써 구현한다. 넘어지는 아무개를 향해 강림차사는 “배고프지 말고, 우리 애기”라는 위로를 건넨다. 정작 아무개는 듣지 못할 그 위로는 객석에 닿는다.
추다혜는 개인의 서사를 모두 하나의 보편으로 압축하여 무대 위에 제시한다. 서사 없는 사람은 없고 드라마 뺀 삶도 없다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마치 누군가가 천편일률적인 기계를 조종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 위의 한 남성인 아무개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므로 우리 모두를 대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개가 청년기에 겪는 고난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개를 향한 사자의 노래가 ‘넘어지고 쓰러지는 게 곧 인생이니 지나고 보면 다 괜찮다’는, 나를 향한 다정한 위로로 들린다.

이제 막 왔고 떠나네…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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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얼마나 길고 짧든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인생사 가장 중요한 클라이맥스다. 그렇다면 그 클라이맥스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죽음에 다다른 아무개는 서러워 노래를 부른다. 그런 아무개 앞에서 일직과 월직은 일시적으로 인간의 역할을 맡아 통곡한다. 우는 인간들 앞에서 마침내 아무개는 “매화타령”을 부른다. 죽음은 더 이상 아무개를 슬프게 만들지 않는다. 추다혜는 남은 사람들을 위해 방울을 흔들면서 테크노 풍으로 편곡된 노래를 한다. 아무개가 이승을 떠날 때 무용수들은 마치 인간의 탄생으로 되돌아간 듯 바닥을 기어 다닌다. 죽음에서 다시 탄생으로의 암시인 것이다.
공연은 인생을 계절로 치환한다. 유년기는 봄, 청년은 여름, 중년은 가을, 노년은 겨울로 말이다. 어쩌면 지루한 문법이지만 여기에는 죽음 뒤 다시 도래할 새로운 생명을 향한 기대가 함축되어 있다. 그것이 추다혜가 제시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다. 추다혜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인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전한다. 죽음과 탄생은 결국 맞닿아 있으니 너무 서러워하지 말 것을, 꽃은 지었다 다시 피는 법이라고.
어떤 한편으로는 의문과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을 살아가는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극형식을 차용한 추다혜의 시도는 과연 효과적이었는가? 삶과 죽음은 결국 순환하므로 인간은 죽음에 대해 서러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다 괜찮다’는 위로를 넘어 분명 무엇인가를 더 ‘말’했어야 한다. 보편으로 치환한 삶 넘어, 우리 인간의 진짜 서러움을 만져주었어야한다. 그래서 극이 끝나버리는 순간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막 왔는데, 떠나?’

강림차사는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는 신도, 살리는 신도 아니다. 유통기한이 끝난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저승으로 데려갈 뿐이다. 그러나 공연에서는 사자들을 무대 위에 내내 배치해두고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지켜보게 한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찾던 사자들은 그 언어로 인간의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삶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행복도, 고난도, 슬픔도, 웃음도 모두 들어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이란 그렇기 때문이다. 생의 유통기한을 감각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아주 먼 ‘언젠가’를 떠올려보는 일.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그 영영 모를 유통기한을 망각한 채로 현실을 살아낸다. 그리고 인간을 아주 깊게 사랑하는 다정한 사자들은 서두에 인용한 시처럼 이 세상에서 인간과 함께, 인간을 가깝고 또 먼 곳에서 위로하며 살아간다. 인간 스스로도 그럴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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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서울남산국악당 / 촬영: BAKI]

2021 남산초이스 <짓- 사자의 언어>
일자
2021.12.10 ~ 2021.12.11

장소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

작·연출
추다혜
음악감독
이향하
전자음악
신예훈
움직임코치
이이슬
무대미술
신승렬
조명디자인
신동선
음향디자인
장태순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유현진
퍼포머
추다혜,이이슬, 하지혜, 지서훤
음악·사운드
이향하, 신예훈
주최
서울특별시
주관
서울남산국악당
제작
소수민족컴퍼니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1011094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