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아트랩 2022 <낙지가 온다>
낙지가 온다. 낙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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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앞에는 백지가 있다. 커서는 깜빡거리고, 그 모양은 마치 시계의 초침 같기도 하다. 채워야 될 공백을 눈앞에 둬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이 백지는 어떤 세상이기도 하다. 나는 하얀 세상 위에 누군가를 걷게 하기도 하고, 달리게 하기도 하고, 넘어지게 하기도 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게도 한다. 백지 속 세상을 가만히 보다 보면 아까의 설렘이 얼마나 커다랬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이것이 또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세상을 짓고, 세상을 부수는 사람들. 세상을 움직이게 하고, 멈추게 하는 사람들. 두려움을 마주해야 하고 기꺼이 맞서는 사람들. 이들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여기 검은 백지 같은 무대가 있다. 스피커 한 개와 몇 개의 책상이 놓여 있다. 무언가가 써질 예정이지만 그것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작가’가 들어온다. 작가의 앞에는 검은 세상이 놓여 있다. 화상 회의 창 너머로 울던 동료의 얼굴이 지나간다. 무수한 말들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시간이 왠지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유독 더 어두운 느낌이다. 고개를 들면 저기 스피커처럼 생긴 네모난 창문이 하나 있다. 거기에는 방충망이 붙어 있다. 방충망의 좁쌀만 한 구멍들 너머 건너편 건물에도 창문이 하나 있다. 열려 있다. “오늘은 출근을 안 하시나요?” 그저 평범한 안부 인사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문득 저기에 뭔가가 있다. 낙지가 있다. 그러니까 작가의 방 창문 너머 건너편 건물의 열린 창문의 방충망에 낙지가 매달려 있다. 어느새 낙지가 온다. 어느새 낙지가 왔다.
낙지라는 단어는 한자 얽힐 락(絡) 자와 발 제(蹄) 자로 이루어져 있다. 얽혀 있는 발이다. 낙지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 한자들이 낙지를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작가 앞에 앉은 낙지와 낙지 앞에 앉은 작가가 서로를 쳐다본다. 두 존재는 어이없이 얽혀버렸고 관객들에게도 어이없는 이 순간들은 유머러스하다. 직전의 울고 있던 동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최순진 배우의 뻔뻔한 낙지 연기도 한몫을 한다. 낙지는 작가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어본다. 없어요. 나는 여기가 제일 좋아요. 내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오직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뿐이에요. 낙지가 설득한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널 데려다줄게. 썩 내켜 하지 않아 하면서 작가는 말한다. 그럼… 거기에 가고 싶어요.
낙지의 발과 작가의 어깨가 얽힌 채 그들은 어딘가로 간다. 계단을 내려가 편의점을 지나고 골목을 나서니 불길이 치솟고, 죽음의 냄새가 피어오른다. 전쟁터다. 매캐한 냄새가 나고,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죽고 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말 그대로 전쟁터니까. 그동안 보아 왔던 ‘전쟁’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쟁 소설, 전쟁 영화, 전쟁 다큐 등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전쟁 ‘이야기’들을 들어왔던가. 멀리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곧 침공할 것이라는 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고,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상태다.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고, 그들과 같이 살고 있다. 전쟁은 인간을 계속 통과해왔고, 인간은 전쟁을 계속 통과해왔다. 전쟁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은 재현을 둘러싼 복잡한 윤리적 책무를 짊어지고 있다. 작가뿐만인가. 역사를 딛고 서 있는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이에 대한 질문이 <낙지가 온다>에서는 중요해 보인다. 작가와 낙지가 부연 설명 없이 헐거운 연결고리로 전쟁터에 감으로써 극장에는 ‘전쟁’이 다시 소환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왜 전쟁터로 가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무엇이 전쟁을 이야기로 계속 만드는가. 공연에서 해소되지 못한 이 질문은 다시 보초병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도대체 이 전쟁을 왜 하고 있나요? 작가는 대답한다. 아주 큰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이고 또한 편안한 삶입니다. 고작, 겨우 편안한 삶을 얻기 위해서 이걸 하고 있다니요. 어쩌면 보초병의 질문이 작가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다시 쓰기 위해 돌아와야만 했을 것이고, 더 정확히는 다시 살기 위하여 돌아와야만 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별다른 수가 없다. 그것이 공연의 어느 부분에선가 들었던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돌아온 작가의 눈앞에 화상 회의 창 너머로 울던 동료가 창밖을 보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걸 쓰겠다고 하던 동료에게 작가는 낙지가 된다. 얽혀 있는 발로 좁쌀만 한 방충망 구멍을 기어이 뚫고 들어간다. 소외감으로부터 왔다는 조금 특별한 그 낙지처럼 말이다. 얽혀 있는 발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소외감은 낙지라는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소외감은 무엇인가. 뭘 써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내가 쓴 것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싶은 우울감, 이런 것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것. 그러니까 스스로 만든 공백으로부터 달아나고자 스스로를 가둬버리고 싶어 하고 끝내는 그렇게 해버리고 마는 그런 마음. 작가는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고 있기도 하다. 하얀 세상 앞에 앉으면 그 안에 그냥 갇혀버리고 싶은 욕망이 종종 샘솟고 동시에 그 벽을 뚫고 나한테 와 줄 어떤 존재를 그리워하거나 혹은 간절히 소망하기 마련이다. 그 존재는 자신이 만들 세상의 누군가일 수도 있다. 또는 자신처럼 또 다른 세상을 짓다 지쳐버린 동료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저 원하는 곳으로 잠시 같이 걸어갔다 올 수밖에 없다. 낙지와 함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의 앞에 여전히 검은 세상이 있는 것처럼 작가들에게 자신이 채워야 할 세상은, 살아야 할 삶은 늘 변치 않고 우뚝 서 있다. 낙지가 처음 등장한 때였을 것이다. 스피커의 뒤통수에 조명이 비치니 맞은편 벽에 진 스피커 그림자 주위로 마치 작은 오로라 같은 빛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주황빛이었을까, 노란빛이었을까, 몇 가지의 색깔들이 번져나가는 모양이었다. 낙지 머리에 반사된 빛 같기도 하다. 광학적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우리 외부에 있는 빛이 역시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반사시켜 생겨난 이미지가 망막에 맺힘으로써 가능하다. 각자의 세상에 도달하는 빛은, 그리고 그 빛이 반사하는 대상들은 기어이 이쪽으로 오고 기어이 그쪽으로 가서 결국에는 만나고 마는 존재들이다. 작가가, 동료가 방충망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여전히 극장 안은 어둡다. 적당한 소란과 적당한 적막함을 안고 일으켜 세워진 작가의 활자1) 앞에서 관객이자 독자였던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끝이 난 이야기의 마지막 장 다음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끝과 시작」의 문장들을 덧붙이고 싶다.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우리에겐 늘 필요하다.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 과거를 회상하면, /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 열심히 끄덕인다. / 어느 틈에 주변에는 /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 아직도 누군가는 /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 이 풀밭 위에서 /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2)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 일자
- 2022.2.10 ~ 2.12
- 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 작가
- 김도영
- 연출
- 민새롬
- 출연
- 최순진, 김정훈
- 무대디자이너
- 박성민
- 조명디자이너
- 성미림
- 음향디자이너
- 박민희
- 공연 홍보물의 연출노트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의 나의 주관적인 독자경험, 특히 ‘청각'에 집중해 그 경험감을 관객에게 전하는 것, 이것이 이번 랩(LAB)을 통해 작가의 활자를 일으켜 세우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선택했다.”
- 「끝과 시작」,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문학과 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