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집단 혜윰 <휴식하는 무늬>
글 ‘쓰는/써야만 하는’ 여자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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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고전극장 시리즈 중에서도 창작집단 혜윰의 <휴식하는 무늬>는 제목에서부터 원본의 변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연극의 원작은 샬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이다. 강제되는 휴식치료법으로 방에 갇혀 지내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이 연극이 되면서 이름 없던 ‘나’에게 ‘로즈’라는 이름이 부여되고, 현대의 인물인 청미와 연생의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새로운 인물과 현재라는 시간성이 추가되면서 복수(複數)의 인물/시간을 통해 다층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청미의 이야기가 외부 이야기가 되고, 로즈의 이야기가 내부 이야기가 되는 액자식 구성이기도 하다. 동화 작가이지만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청미가 쓴 소설이 「누런 벽지」가 되고, “유일하게 결말 못 낸 소설”을 기필코 완성해내는 이야기가 그대로 <휴식하는 무늬>가 되면서 책과 연극이 상호 영향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무대 가운데에는 희고 큰 침대가 놓여 있고, 침대 뒤에는 무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흰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커튼에는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는데, 이는 억압적인 ‘누런 벽지’인 동시에 해방적인 ‘휴식하는 무늬’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무대의 양쪽 끝에는 각각 책상과 의자가 하나씩 놓여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왼쪽은 로즈의 공간, 오른쪽은 청미의 공간이 된다. 두 인물은 자신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고, 침대를 공유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를 인식하면서 무늬를 공유할 때 존재와 마음을 교류하는 만남이 가능해지게 된다.
겹의 이야기
무대 구조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삶도 데칼코마니로 나타난다. 로즈의 산후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남편인 존이 로즈를 저택으로 데려온 것처럼, 청미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연극배우인 남편 연생이 청미를 바닷가로 데려온다. 로즈와 청미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글쓰기를, 휴식을 이유로 남편이 말린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존과 연생은 임의대로 로즈와 청미의 상태를 ‘진단’하고, ‘처방’과 ‘결정’을 내린다. 특히 존은 의사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목욕, 식사, 스트레칭 시간 등의 스케줄을 촘촘히 구획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허락된 방은 휴식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글쓰기는 몰래 해야 하기에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통제 속에서 탈출구이자 숨 쉴 곳은 “나만의 스케줄”인 글쓰기뿐이지만 철저하게 외로운 상황에서 써야만 한다.
게다가 산후우울증과 불면증은 예민함의 증거가 되어 남편이 아내의 말을 막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통제는 여자들이 글을 못 쓰게 하는 방법 중 하나인 ‘금지하기’로, 이처럼 창작자가 되는 것 자체를 방해하는 것은 자신감, 에너지, 시간을 파먹고 ‘의욕 꺾기’를 하면서 여성의 내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며 정체성을 분열하게 한다.1) ‘생각이 몸에 좋지 않다’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존은 일하고 싶어 하는 로즈를 방해하면서 언어를 소거한다. 로즈가 언어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은 존이 책을 읽어 줄 때뿐이다. 언어를 독점하고 박탈하면서 공상을 거부하고 현실과 의지를 강조하는 그의 말은 이성/감성, 합리성/비합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 속에서 전자를 가리킨다. 표면적으로는 ‘아내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한다고 말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것임이 드러나는 순간, 다정함을 가장한 남편의 위선이 폭로된다.
연생의 실체가 밝혀지는 장면에서도 그의 기만이 드러난다. 연생이 바닷가에 온 이유는 오디션을 본 극단의 연습 장소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청미는 배신감을 느낀다. 연생의 위선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청미는 딩크족을 선택했고 남편과도 합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생은 아이가 없는 것을 결핍이라고 하며, 청미가 글을 쓰지 않고 휴식을 원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자신이 무대에 오르면 돈을 벌고 편하게 살게 되며 두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자기 합리화가 이어진다. 이는 피임약을 바꿔치기 하는 폭력으로까지 점화된다. 청미는 결국 분노한다. 이처럼 청미의 에피소드에서는 남편의 이중적인 태도가 현실적인 문제와 맞물리며 극적인 충격을 그리면서, 로즈의 고통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역동적인 무늬 분석가
억압된 상황에서 고독을 느끼는 두 인물은 누런 벽지에 나타나는 무늬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뜯겨 있는 벽지들은 “역겨운 색”을 지니고 있으며 불결하고, 부릅뜬 눈처럼 보인다. 로즈는 ‘무생물에도 표정이 있다’라고 하면서 벽지와 무늬들에 압도당하며 감정적인 동요를 보인다. 그러다가 무늬가 대칭, 교차 반복, 동일 반복, 방사 등 그 어떤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며, 무늬들의 변주를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회복하게 된다. 로즈―청미는 벽지의 분석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유롭고도 혼란스러운 무늬에 객관적인 거리를 두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떠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때에도 존은 “많이 회복되고 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임대 기간을 언급하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로즈를 신경쇠약 환자로 취급하면서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것이다.
이 단계를 넘어서자 로즈는 무늬를 의인화하게 된다. 연극에서는 벽지를 커튼으로 나타내면서 동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무늬 역시 흰색 옷을 입은 배우들의 무용으로 표현하면서 역동성을 강화한다. 꿈틀거리기도 하고, 물결치기도 하는 복수의 무늬들은 무대를 채우면서 불안을 전달한다. 그와 같은 무늬의 위력은 전염되어 옷에도 얼룩이 묻게 되고, 로즈는 시누이 메리와 남편 존도 무늬에 압도당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자신은 그 단계를 넘어섰기에 “무늬를 알아낸 사람은 나뿐”이라고 하면서 웃음을 보인다. 나아가 무늬 속에서 여자를 발견한 로즈는 몰입하고 즐거워한다. 급기야 벽지의 냄새까지 맡으면서 사방에 창궐한 ‘누런 냄새’의 공감각적인 힘에 사로잡혀 벽지만 분석하던 로즈는 분석 대상과 동일시된다. 그 뒤 잠긴 방을 난폭하게 노크하는 존에게 열쇠가 정원에 있다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드디어 방에 들어온 존을 로즈가 사냥하듯이 쓰러뜨린다. 초반에는 존이 로즈를 억지로 침대에 누워 휴식하게 했었는데, 이제는 반전되어 로즈가 존을 누워 있게 하는 것이다. 로즈가 존을 타 넘어 다니는 전복적인 상황에서 밝은 음악이 흐르고, 무늬들은 로즈를 응원한다. 로즈는 해방과 자유를 느끼며 소리를 지른다.
열림의 휴식, 휴식의 열림
무늬에 전염되는 것은 로즈뿐만이 아니다. 청미 역시 작가로서 처음에는 등장인물인 로즈를 지켜보고 있다가 점차 로즈에게 다가가고,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늬가 된다. 로즈가 보는 무늬 속의 여자는 청미이기도 하다. 무늬 속에서 서로를 발견한 순간 두 사람은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서로를 의식하자 액자가 무너지고 틀이 사진 속으로 들어가며, 사진은 틀이 된다. 청미는 이제 멈출 수 없다고 하면서 신들린 듯 글을 쓰고, 로즈가 종이에 새겨진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완벽하게 겹쳐지는 순간, 청미는 로즈에게 이제 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연결된 두 사람은 마주 본다. 억압을 넘어 ‘쓰는/써야만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무늬 안에 들어갔던 두 사람은 “진짜 휴식을 찾아요, 우리”라는 말과 함께 자신들만의 글을 쓰기 위해 무늬 밖으로 나간다. 강압적인 휴식과 관련 있는 방에서 멈춰 있지 않고, 진짜로 휴식할 수 있는 세계로 움직이기 위해 방을 떠난다. 연대하는 그들의 휴식은, 휴식하는 무늬는 열린 채로 완결되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글 쓸 때 행복한 여자들을 내버려 두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진정한 자유를 줘 보라. 그들은 참여할 것이다”2) 라는 말처럼. 자유롭게 글을 쓰면서 원하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세계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결말이 너무나도 희망적이기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거나 쉬운 마무리를 짓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러한 희망이라면 얼마든지 반복하고 싶다.
[사진 제공: 소극장 산울림]
- 일자
- 2022.3.2 ~ 3.6
- 장소
- 소극장 산울림
- 원작
- 샬롯 퍼킨스 길먼
- 재창작·연출
- 연지아
- 출연
- 김예별, 김양희, 한상욱, 윤혁진, 윤소연, 이혜린, 임영규, 편다솜
- 움직임
- 임영규
- 조명
- 윤혜린
- 음향
- 오후의 고양이
- 분장
- 최은선
- 제작감독
- 김재홍
- 조애나 러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박이은실 옮김, 낮은산, 2021, 65쪽.
- 위의 책,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