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그린피그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윤영선의 작가 거울에 비친 지금/여기 우리

이경미
216호 2022.04.14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윤영선이 1997년에 쓴 짧은 희곡이다. 이후 이성열 연출에 의해 간단한 워크숍을 거쳐 2000년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과 서울연극제에서 정식으로 공연되었는데, 이 희곡의 첫 장면에서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난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을래. 문을 열고 나가면 정글이야. 번들거리는 눈으로 누군가 날 노리고 있어. 새 같은 가슴으로 조심스럽게 숨을 쉬며 머리 위에 새 집을 지을 수 없을까. 내 발바닥엔 왜 뿌리가 나지 않을까. 내 피는 너무 뜨겁고 너무 새빨개. 푸른 액체를 빨아들이며 견딜 수 없을까. 머리 위엔 새들을 키우며(…) 하지만 내 손은 무엇인가를 움켜쥐려 하네. 내 눈은 무엇인가를 보려고 하네. 내 귀는 무엇인가를 들으려하네. 내 입은 뭔가를 먹으려 하고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네. 내 발은 어디론가 가려고 하네”1)

여자는 끝내 나무가 될 수 없었다. 세상이 절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가하는 톱질에 ‘나무는 비명과 함께 피를 흘리며 가차 없이 잘려나갔고, 새들의 집은 땅에 떨어졌고, 놀란 새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땅은 사방으로 갈라졌고 풀들은 창백한 얼굴로 떨어댔고, 놀라서 미친 듯 날아다니는 거미, 그 거미가 내뱉은 거미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얽히고 말았다’. 나무가 되고 싶었던 여자는 죽음을 택했다. 죽어서 나무가 되었다.

본문사진1

열린 텍스트, 윤한솔 연출과 극단 그린피그의 다시 쓰기

윤영선(1954-2007)은 자신의 언어가 절대 다른 언어보다 우세하지 않다고, 작가인 자신의 언어 위로 무수한 다른 언어들이 통과하고 횡단할 때 비로소 진정한 언어가 생성된다고 이야기했던 작가였다. 그는 자신의 희곡이 모든 다양한 다른 언어들이 자유롭게 순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늘 다른 누군가의 언어가 다가와 자신의 희곡을 새롭게 깨워주기를 기다렸다.

(…) 텍스트는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자기 몸을 열고 자기 몸의 속삭임과 외침을 들려주기를 열망한 채(…) 희곡 텍스트를 읽을 때는 내가 읽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등 뒤에서 함께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어와 세계는 서로 어긋나고 잠정적 화해를 할 뿐이다. 자기가 택한 현실 속의 삶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의 선택 중의 하나로 직조되듯 텍스트도 작가에 의해 수많은 행동의 지류 중의 하나를 본류로 택했을 뿐이다(…) 텍스트는 (…) 잠들어 있다. 모든 것이 깨어났을 때, 정지된 불길이 타오르고(…) 그때야말로 진정한 마법의 순간이다. 응결된 공간에 시간이 흐를 때, 아니면 공간이 시간성을 획득했을 때야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2)

2012년 초연에 이후 10년 만에 다시 윤한솔의 연출로 공연된 극단 그린피그의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작가 윤영선이 흔쾌히 열어 놓은 이 기다림에 대한 적극적인 대답이었다. 나무가 될 수 없는 인간, 정확히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 비틀어진 세상에 대해 질문하며 작가가 열어 놓은 텍스트의 행간을, 그들은 시장 자본주의의 광기와 함께 그것이 부추긴 인류세의 문제로 마저 채워 넣었다. 이로써 이 희곡의 공간과 시간은 새롭게 태어나, 작가가 바란 대로 새롭게 숨을 쉰다. 10년 전에도 그랬다면, 그때와 또 다르게 암울해진 지금/여기, 우리의 이야기로, 우리의 호흡으로.

본문사진23

‘오이디푸스들’이 망친 세상,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아이들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 바닥은 온갖 재활용 쓰레기로 가득하다. 극심한 산통을 겪고 있는 엄마는 자기 뱃속의 태아(들)에게 이제 제발 세상 밖으로 나와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태아들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럴 만하다. 엄마라는 존재는 무거운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있으며, 암 한두 개를 달고 산다. 태어나기도 전인 태아들의 몸 안에도 암이 자라고 있다. 자신들의 손가락이 몇 개가 될지도 알 수 없다. 바깥 세상에는 머리 뼈 없는 돼지들이 돌아다니고 물 속의 물고기들은 무슨 백열등처럼 빛이 난다. 이런 자신들을 ‘싸지른’ 아버지란 인간들은 여전히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마침내 태아들은 자기 엄마에게 계약서를 요구한다. 어떤 방독면을, 얼마나 오래 제공할 것인지, 어떤 품질의 캡슐을 은신처로 제공할 것인지.
이게 다 그 ‘오이디푸스’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발이 부은 자’이지만 동시에 ‘발로 재어서 끊임없이 알려고 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를 절대적인 신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욕망에 휘둘리다가 결국 이런 자신의 불완전함을 시인하고 더 높은 성찰의 단계로 나아가는 이상적 존재로 해석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는 그를 끊임없이 자기 앞의 장애를 걷어내며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인간의 완벽한 대명사로 보았다. 인류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오이디푸스의 ‘발’은 계속해서 새 신발로 갈아신었다. 권력과 제도의 신발로, 종교의 신발로, 지식의 신발로, 그리고 자본의 신발로… 무엇이 되었건 그 신발은 한결같이 ‘휴먼(human)’의 색깔로 장식되었다. 수많은 ‘오이디푸스들’은 그 신발을 신고 자신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새롭게 기획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무한한 자기생산에 대한 환상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본문사진45

하지만 지금까지 진보라는 이름으로 인류를 추동했던 팽창의 서사는 이제 동력을 잃었다. 성장의 신화는 끝이 났고, 우리 중 누구도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할 사람은 없다. 그뿐 아니다. 인간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가 충돌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위한 도구 혹은 자원으로 소비했던 자연은 이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지구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성이 되었다. 물론 이를 우려하는 경고들이 도처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늘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자연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배경으로 여긴다. 아니면 더 쥐어짜서 시장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게 끼얹을 윤활유로 생각한다. 상황이 이런데 상당수 정치꾼들과 자본시장, 그리고 학자들은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아니 외면한 채 연신 낙관적인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별일 아니라고, 그저 예민한 몇몇 사람들의 과장된 반응이라고, 여러 제도적, 기술적 장치들을 가동해 충분히 제어 가능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잊어버린다. 그런 가운데 지구 곳곳에서는 여전히 폭염과 가뭄, 홍수와 산불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동물과 곤충이, 물고기가 죽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린다. 이 모두가 끊임없이 세상을 발로 재어 수치화하고 계량화했던 오이디푸스들의 신발이 지나간 흔적이다. 물론 우리는 다시 놀란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잊어버린다.

정말 문제는 당신들의 무감각이야

윤한솔과 극단 그린피그는 윤영선이 열어 놓은 원작의 공간을 정휘창의 동화 『원숭이 꽃신』과 함께, 윤영선의 또 다른 희곡 「미생자」와 「떠벌이 우리아버지 암에 걸리셨네」의 일부를 각색해 총 15개의 에피소드로 새롭게 채워 넣었다. 얼핏 보면 이들은 원작은 물론이고 서로에 대해서도 아무런 유기적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 동물과 인간, 태아의 경계를 종횡으로 오가는 배우들은 이 에피소드들을 그 상태 그대로 객석의 관객을 향해 툭툭 던진다.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조차, 그들 발화의 최종 종착점은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이고 더 나아가 극장 밖 세상이다. 이들이 이처럼 일일이 앞뒤 맥락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사실 관객들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본문사진6

중요한 것은 이내 잊어버리고, 혹은 그다음으로 다시 미뤄놓을지언정, 어떻게 해서라도 계속 관객의 무감각을 뒤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공연의 낯섦 혹은 불편함은 어쩌면 의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배우의 연기,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질적 리듬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황과 만남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구성하면서 스스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실제로 관객은 ‘나무’, ‘발’ ‘신발가게’의 주변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모아 일부는 서로 연결하고 일부는 다시 놓쳤다 다시 잡는 것을 반복하면서, 어느새 저 낯설어 보이는 인물과 상황들 속에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작가 윤영선이 자신의 언어를 다른 언어와 공유하면서 궁극적으로 가닿고자 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윤한솔 연출과 극단 그린피그의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나무가 될까?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나무는 머리 위에 새를 키운다. 새는 가장 높은 곳에 집을 짓는다. 나무는 왜 하늘로 오르지? 중력은 얼마인가? 기억하니? 뿌리는 중력의 힘으로 땅 속으로 들어가지만 왜 나무는 위로 오를까? 왜? 왜 꽃을 피울까? 나무는 무엇을 꿈꿀까? 왜 꽃은 색깔이 다를까? 나무는 삶을 견디기 위해 붉은 꿈을 노란 꿈을 파란 꿈을 꾼다. 1999, 윤영선

윤영선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났고, 윤한솔과 극단 그린피그가 윤영선이 남긴 질문에 처음 대답을 하고 나서도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세상은 어느 때보다 급격하게 바뀌었고, 인간과 인간의 지구적 삶에 대한 위기감 또한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고 있다. 인류는 앞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파국에서 구원될 수 있을까? ‘오이디푸스들’, ‘오소리들’, ‘원숭이들’의 신발에게는 진보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까? 이들이 남긴 무수한 폐기물로 가득 찬 무대를 뒤로 하고 나오며, 갖가지 질문이 내 안에서 다시 생긴다. 인간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만들어야 할 때다. 극도의 고통에 신음하다 서서히 인간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지구에 대한 인간의 관계 역시 새롭게 다시 짜야 할 때다. 그렇게 윤영선은 극단 그린피그를 통해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본문사진7

[사진 제공: 그린피그]

그린피그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일자
2022.3.26 ~ 4.3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윤영선
글쓰기
전성현
연출
윤한솔
출연
김원태, 박수빈, 박유진, 이동영, 이주형, 이지원, 이승훈, 정대용, 정양아, 정연종, 황미영
음향
전민배
조명
최보윤
음악
옴브레
의상
온달
오퍼레이터
박현지
조연출
주은길
기획·무대감독
㈜스텝서울컴퍼니
그래픽디자인
워크룸
제작
그린피그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01971
  1. 윤영선,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윤영선 희곡집 1』, 평민사, 2001, 253쪽.
  2. 윤영선, 미발표글 『텍스트1』, 안치운, 「윤영선 희곡 연구: 죽음과 애도의 글쓰기」, 『한국연극학』 52(2014.04), 117-157, 121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