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프랑코포니 <너 자신이 되라>
소극적(消極的) 웃음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너 자신이 되라>는 한 락스 회사의 취업 면접에서 벌어진 상황을 다루는 이인극이다. 취업 면접은 기본적으로 지원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기울어진 만남이다. 지원자는 선택받기 위해 자신의 장점을 최대치로 호소한다. 하지만 지원자는 자신의 장점을 말할 때도, 약점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도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 두렵다. 면접관은 지원자에게 의도적으로나 돌발적으로 어려운 질문이나 요구를 하곤 하며, 지원자는 이를 거절하기 어렵다. 거부나 회피 자체가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택하는 자와 선택받는 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서는 긴장과 불안, 기대와 의심이 필연적이고, 그렇기에 이러한 극적인 감정은 연극의 동력원으로 유용하다.
그런데 왜 하필 락스일까? 지원자 입장에서는 무엇을 파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고 마침 락스 회사에서 사람을 구하기에 지원했을 뿐이다. 그는 락스가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샴푸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물에서 소외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만약 그게 문제라면 우리는 저 유명한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 무엇을 팔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중요한 건 무엇을 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파느냐에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부서라면 그 상품이 무엇이든 고객과 소통만 잘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지원자에게 부장은 묻는다. “왜 락스죠?” 부장에게 락스는 신앙이다. 부장은 뭐든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그건 기본이고) 락스신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자기 신에게 정(淨)한 신도를 찾고 있다. 그에게 있어 락스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을 정화하는 성수다. 그가 찾는 사람은 이 거룩한 성물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한점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알고,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불순물은 허락되지 않는다. 락스신 앞에서 불순한 오염물은 다 타버리고 말테니까.
하지만 부장의 이야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벽면에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그노티 세아우톤)’라는 희랍어 글귀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 이곳은 델포이를 흉내 낸 사이비 신전이다. 벽면에 격자형으로 배열된 락스병 장식을 보면서도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작가는 아무런 장식 없는 방을 원했다) 락스병은 락스에 대한 단순 환유일 수 있다. 하지만 병은 락스의 안티테제이기도 하다. 병은 락스가 세계와 만나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방어벽으로서, 락스의 전능성에 대한 반증이며 그것이 한낱 인간이 길들일 수 있는 물질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결국 락스에 대한 신앙은 그저 물신숭배(fetishism)일 따름이다.
부장의 컬트적 성격은 점점 황당하게 흘러가는 대화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부장은 지원자의 외모에 대해 질문하더니 이내 성형수술을 했냐고 묻는다. 그런 다음 지원자의 성생활에 대해 묻고, 노래로 자신의 열정을 증명하라고 하고, 옷을 다 벗고 춤을 추라고 한다. 자신을 유혹해보라고 하더니 마침내 러시안 룰렛을 요구한다. 그것도 리볼버도 아닌 자동권총으로. 이 모든 걸 아주 진지하게 면접의 일부이자 업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락스신의 제사장에게는 이 말이 다 진심일 수 있다. 지원자가 얼마나 순수하게 일자리를 원하는지, 취업을 위해 어디까지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적어도 부장에게는 분명 취업 면접의 일부일 수 있다. 하지만 관객이 그 말에 수긍하는 순간 관객은 부장과 함께 이름도 모르는 한 청년을 죽인 공범이, 최소한 방조자가 된다.
이 고약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교묘한 방식으로 중범죄를 저지르는 악당과 희생자의 비극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세태를 풍자하는 희극으로 봐야 할까? 공연 소개에 ‘판타지’, ‘희비극’이란 단어가 있는 걸로 보아 창작진도 고심했던 것 같다. 비록 두 단어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긴 하지만, 이 작품은 희극으로도 비극으로도 볼 수 있는 양면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희비극’으로, 그리고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을 담고 있기에 ‘판타지’로 이해할 여지가 없지 않다.
비극이라면 이 이야기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꽤 고전적이다. 극구 사양하는 남편에게 ‘레드 카펫’을 밟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다음 욕실에서 살해해버린 클뤼타이메스트라처럼, 부장은 자기 회사에 지원하러 온 젊은이를 장남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린다. 지원자가 어리숙해서가 아니라 부장이 이야고 수준의 슈퍼 빌런이기 때문이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커플은 이야고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야고가 ‘정직’한 줄 안다. 지원자는 그나마 부장의 면접 방식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조금 이상한 면접이긴 해도 이 고비만 지나면 어엿한 직장이 생긴다는 기대감을 가졌던 지원자를 탓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직설과 메타포의 경계를 오가며 언어에 혼란을 가져오고, 나아가 자신의 “신체장애로 인한 불편”을 적극 활용하여 지원자를 유도하는 부장을 지원자는 상대할 수 없다. 가령 부장은 자기 자신이 되라고, 자기를 감추고 있는 껍질을 벗으라면서 옷을 다 벗으라고 요구하는데, 이 요구는 면접관이 자신의 실명(失明) 상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승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이 연극은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을 다루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제공될 필요가 있었다)
이 작품을 비극으로 읽을 때 우리는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으며, ‘인간은 미소 지으면서도 악당’일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부장이 사용한 가스라이팅은 별반 새로울 게 없지만, 그러한 수법은 절박한 위치의 젊은이에게 여전히 잘 통하고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는 관객은 어김없이 무력감과 공포를 맛보아야 한다. 부장은 생쥐 앞의 고양이처럼 포식자가 먹이를 다룰 때의 잔혹함을 즐긴다.
하지만 최소한의 시적 정의도 이뤄지지 않는 이 작품의 결말을 보며 우리는 ‘비극이 이래도 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대신 덕분에 이 광경을 지켜보는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이는 모종의 쾌감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일에 대한 아무 열정 없이 일자리가 주는 안정만 탐하는 누군가가 내 주변에 있다면, 그래서 그 구멍을 내가 메꾸며 분통이 터져야 했다면 더더욱. 차마 드러내기에는 어딘가 부적절한 것 같고, 그래서 노골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부장에게 어느 순간 감정이입할 수도 있다. 그래도 죽이는 건 좀 심하지 않나? 괜찮다. 우리 내면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것 역시 비극의 중요한 역할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메타포니까.
‘아니, 안 괜찮다. 메타포라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연극을 희극으로 이해해보려고 시도할 수 있다. 진지하게 들으면 너무 이상한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일단 이게 농담은 아니었는지 물어봐야 한다. 이 연극엔 분명 분명 희극일 때만 용납할 수 있는 과도함이 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웃기 어려웠다. 이유가 뭘까.
우선 누가 웃을 수 있을까? 부장님들만, 혹은 최소한 이미 원하는 직장에 들어간 사람만 이걸 보고 웃을 수 있다. 취업 면접에서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이 연극을 보며 웃음 포인트를 찾기 어렵다. 면접에서 떨어져 본 사람도 그래서 자존감에 치명상을 입어 본 사람도 이 연극을 보며 웃기는커녕 트라우마가 떠오를 수 있다. “나 자신이 되라”고? 이 얼마나 기만적인 요구인가. 면접은, 그것도 취업 면접은 나를 있는 모습보다 더 잘 드러내 보이는 게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곳이다. 물론 포장한다고 더 잘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의 나됨이 면접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어떻게 그냥 나 자신이 될 수 있는가. 평소 잘 웃지 않는 사람도 억지웃음을 머금어야 하는 게 면접이다. 내게 선택권이 없는 처지에서 나 자신이 되라는 요구는 교묘한 시험이지 결코 심오한 질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풍자라면 지원자의 입장에서도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소위 압박면접에 대한 풍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풍자는 약자가 강자를 비웃을 때 흥미롭다. 그런 점에서 압박면접의 부작용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보기엔 다소 때늦은 농담 같다.
여전히 힘이 센 상대로서 위계(位階) 폭력에 대한 풍자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게는 이 연극이 위계 폭력에 대한 풍자가 아니라 어째서인지 그 자체의 재현처럼 다가왔다. 찰리 채플린의 말을 되새겨 보자면, 인생의 어떤 모습도 희극이 될 수 있다. 대신 그러려면 거리가 필요하다. 웃음이 나지 않는 이유를 거리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연극을 보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4대 폭력예방교육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성희롱 예방 시청각 교육을 보면 잘못된 행동의 사례를 상황극으로 보여주곤 한다. 이러저러한 행동은 성희롱에 해당하니 주의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너 자신이 되라>는 성적 괴롭힘을 포함한 위계 폭력 예방 교육의 종합판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엔 명시적 교훈도, 시적 정의도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부터 고민하게 된다.
풍자는 상식, 혹은 공유된 양식(良識)에 기반한다. 웃어야 할 부분을 따로 설명해야 한다면 그 농담은 실패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현재 집중적인 교육이 필요한 사안은 풍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특정 언동이 부적절하고 위법적임을 알리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도 법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해당 언동이 심각할 정도로 만연하지만 그에 대한 합당한 판단이 자연스럽게 상식화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청중이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풍자가 불가능하다.
그래도 최근 연극계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니 풍자가 성립하지 않을까? 성평등하고 안전한 공연창작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연극계의 자발적인 노력인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TS)에는 ‘성적 괴롭힘 및 위계폭력’을 정의하면서 성적 괴롭힘에 해당하는 것을 열다섯 가지 사례로 설명하는데, <너 자신이 되라>의 텍스트 및 공연은 대략 다음의 항목과 관련된다:
성적 농담과 신체 접촉; 원치 않는 성적 접근이나 성적 제안을 하는 것; 성적 접근을 거부하면 오히려 비난하며 모욕하는 것; 성적 접근을 거부하면 불이익을 준다며 위협하는 것; 성적으로 접근하며 이익을 보장하는 것; 개인의 신체, 태도, 성적 활동에 대해 비하하는 것; 성적인 의도가 담긴 사진이나 영상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보내거나 전시하는 것; 성적 괴롭힘을 허용하고 묵인하는 것; 불편함을 드러낼 수 없는 분위기와 상황을 조장하는 것; 성적 일탈이나 욕망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것을 예술적 표현으로 정당화하는 것.
오해하지는 말자. 이 연극이 KTS를 위반했다는 것이 아니다. KTS는 공연 제작 과정에서 작업자 간에 이와 같은 언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지, 이러한 내용을 공연에서 다루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는다. 물론 KTS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언동을 옹호하거나 방조하는 공연을 지지할 수 없고, 그러한 내용을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것 역시 환영하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 사회, 그리고 연극계는 제도적으로나 자체적으로 성폭력에 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안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 점에서 웃음을 위한 거리감이나 유연성은 쉽게 확보되지 않는다. 만약 창작진이 더 적극적으로 웃음을 유도하고자 했다면 배우들은 물론 공연 제반 요소에서 더 명확한 희극적 제스처가 있어야 했다. 예컨대 음악이나 조명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지한 분위기를 차단하기 위해 필요했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기계적) 경직성은 웃음의 대상이 가지는 특성이다. 그러나 자는 사람은 깨워도 자는 척하는 사람은 못 깨우듯이, 웃어야 할 사람이 경직되면 어떤 것으로도 웃길 수 없다. 혹시 이렇게 경직된 현재 우리 사회, 특별히 우리 연극계의 ‘엄숙주의’를 풍자하는 게 이 연극의 의도였을까? 이 정도의 유머에도 웃지 못하는 관객을 비웃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적어도 나는 이 연극이 노렸던 조롱의 대상으로 적합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연극에서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질 수 있다면 그 비웃음도 반갑다.
관객 모독이 목적이었다면 무대 후면 벽에 설치되어 있던 거울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부장의 요구로 지원자가 옷을 다 벗고 알몸이 되었을 때 지원자는 다행히 매우 우연히도 무대 위에 있던 짐볼을 이용해 자신의 서혜부를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뒷벽의 거울로 인해 관객은 지원자의 벗은 뒷몸을 고스란히 보게 된다. 배우의 엉덩이를 비춘 그 거울은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면서도 노출이 ‘반드시’ 필요했냐고 묻는, 요즘의 엄숙한 풍토를 꼬집는 걸까. 작가는 거울을 지시하지 않았고, 지원자가 의자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탈의하도록 지시했던 것을 고려했을 때 이와 같은 선택은 다분히 공연이 이뤄지는 지금 이곳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한다.
나로서는 거기 왜 짐볼이 처음부터 배치되어 있었는지, 원작의 젊은 여성 지원자를 젊은 남성으로 바꾸었는지, 그리고 배우의 나신을 비추는 위치에 정확히 거울이 배치되어 있었는지 다른 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이래로 거울은 아주 유명한 연극의 메타포다. 그런데 햄릿이 생각했던 연극 거울은 단순히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관객의 양심을 찌르는 비수 같은 거울이기도 했다. 뾰족한 역삼각형 형태를 하고 있었던 이번 연극의 거울 역시 우리의 양심을 찌르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공연은 한 가지는 분명 성공했다. 알몸의 배우가 짐볼을 앞에 들고 비욘세의 ‘싱글 레이디스’에 맞춰 춤을 출 때 나는 클로디어스처럼 연극을 중단시키고 싶었다. 바나나 껍질에 넘어지는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면 웃을 수 없다. 나는 배우가 안쓰러웠다.
[사진 제공: 극단 프랑코포니, 촬영 김솔]
- 일자 2022.11.03 ~ 11.20
- 장소 소극장 알과핵
- 작 콤므 드 벨시즈 연출 까띠 라뺑 역/드라마투르기 임혜경 출연 김은희, 마광현 조연출 문선주 무대디자인 심채선 조명 유성희 의상 박소영 분장 장경숙 음악 조성필, 장석규 포스터디자인 박재현 연습사진/아카이빙 김보경 기획 조혜랑 홍보 이보람 사진 김솔 영상 김기성 포스터메이크업 신나나 제작 극단 프랑코포니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3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