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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기획 무장애 공연 <틴에이지 딕>

리처드 3세가 미국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악인인 이유는

이서연
227호 2022.12.08

미국 TV드라마 <오피스(The Office)>를 본 적 있으신지 궁금하다. <오피스>는 종이 회사 ‘던더 미플린’의 스크랜턴 지부 사무실의 일상을 보여주는 시트콤이다. 지점장 ‘마이클’은 이따금 팀원들에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더 쉽게, 더 더 쉽게 비유해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현 상황에서 내가 마이클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게 「리처드 3세」라면, 「틴에이지 딕」은 미국 극작가 ‘마이크 루’가 만든 비유인 셈이다. 물론 <오피스> 속 비유와 마이크 루가 재창작한 「틴에이지 딕」은 결이 다르다. <오피스> 속 비유는 보통 ‘어려운 1 : 매우 쉬운 1’로 대응하는 데 비해, 「틴에이지 딕」의 경우 ‘어려운 「리처드 3세」 : 매우 쉬운 「리처드 3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처드 3세」가 극복할 수 없는 악과 그 최후를 다뤘다면, 「틴에이지 딕」은 「리처드 3세」의 인물 설정과 서사를 유사하게 가져가는 동시에 결국 몸 자체를 드러내며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이 시작된 후 첫 번째로 읽은 희곡이 「틴에이지 딕」이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주관한 ‘유니버셜플레이’에 참여한 덕분이다. 어라라, 예에전에 읽어본 「리처드 3세」는 어려웠었는데……. 마이크 루가 미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현대화하여 각색한 「틴에이지 딕」을 읽을 땐 이상하리만큼 잘 읽어 내려갔다. 원작 「리처드 3세」는 추한 외모로 태어나 살 바에야 악인이 되기로 결심한 리처드 글로스터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과 그의 ‘비극적’ 최후를 그린 희곡이다. 그 과정에는 포악한 성격이라는 포장지 아래 숨겨진 비겁한 선택들, 사랑 아님, ‘극복’하지 못함이 녹아 있다. ‘리처드 3세’는 연극 속, 희곡 속 장애인 인물을 찾을 때 제일 먼저 언급되는 인물일 것이다. 이는 「리처드 3세」가 자주 상연되는, 유명한 희곡인 이유도 있겠지만1), 애초에 희곡 속 장애인 인물이 많지 않아 떠올릴 수 있는 풀이 좁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리처드 3세」를 정독한 적은 없더라도 리처드 3세의 특징적인 외모를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정확히 어떤 장애인지는 몰라도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것이다. 그런 나에게 <틴에이지 딕> 주인공 리처드 글로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벌써 판단을 내렸지. 내가 영웅은 아니란 걸 벌써 알고 있었잖아. 내가 다리를 절면서 들어올 때부터.”

<틴에이지 딕>의 공연 사진. 밝은 나무 바닥이 깔린 무대의 오른쪽에 교단이 있고, 네 개의 학생용 책상이 교단과 나란하게 일렬로 놓여있다. 네 명의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있고, 각 배우의 왼쪽 뒤편에는 수어통역사들이 위치해 있다. 교단 옆에서는 노란 가디건과 갈색 바지를 입은 교사 엘리자베스가 주먹 쥔 두 손을 들고 무언가를 열렬히 말하고 있고, 학생들은 시큰둥한 모습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고 있다. 무대의 뒷벽에는 자막해설이 띄워져 있다.

원작 「리처드 3세」에서 왕위를 찬탈한 리처드 글로스터는 <틴에이지 딕>에서 학교 서열 1위가 되고 싶은 뇌성마비 고등학생으로 변모한다. <틴에이지 딕>은 교내 서열 3위 서기 리처드가 인기 많은 교내 미식축구팀 쿼터백이자 ‘일못’ 학생회장 에디를 물리치고 새로운 학생회장이 되기 위한 고군분투를 담는 매운맛 하이틴 연극이다. 리처드는 혼자 있을 때나,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모략을 세운다. 리처드가 혼자 공상에 빠질 때마다 푸른 조명이 은은하게 깔리는데, 원작 대사를 인용하는 등 오래된 어투를 사용해 그의 음침한 속내를 한층 부각한다. 리처드가 떠나는 회장 자리 찬탈 여정은 멀고도 위험하다.
리처드는 공상에 빠져 시간을 보내다 종종 지각한다. 리처드는 “보시다시피”를 시전하고, 클라리사는 반복되어온 용인에 불만을 갖는다. 엘리자베스 선생님은 머뭇거리다 “리처드를 좀 봐, 다르게 대할 필요가 있잖아”라 답한다. 이유는 콕 집을 수 없지만 당연히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태도를 놓치지 않고 꼭 이용하는 리처드는 “히히~” 웃으며 목표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리처드는 그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자신의 다름을 기꺼이 내어주고 배로 갚는다.
리처드의 권력을 향한 욕망과 앤과의 사랑은 긴장감을 유지하며 대립한다. 리처드는 모략의 일환으로 에디의 전 여자친구인 앤에게 접근하는데, 이는 댄스파티에 퀸카 앤을 데려가 권력을 얻고자 함이다. 리처드는 연습실에서 앤에게 춤을 배우며 넘어지고, 솔직해지고, 함께 춤을 추고, 사랑을 확인한다. 앤 역시 리처드에게 투명해지며 에디와 헤어진 비밀 사유를 털어놓는다. 하지만 리처드는 이 비밀을 악용함으로써 결국 양립하던 권력욕과 사랑의 대결에서 사랑이 지고, 관객은 일말의 희망을 빼앗긴다. 리처드는 앤에게 견딜 수 없는 배신감과 상처를 던졌고, 앤은 생을 끝낸다. 소문을 듣곤 와글와글 떠들어대던 익명의 트윗들은 금세 앤을 추모하기 시작한다. 슬롯머신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타임라인 안에서 에디는 악인이, 리처드는 영웅이 되어 있다. 리처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악의 길을 달린다. 유령이 된 앤의 말도,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종내 그가 달달 외우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반대하는, 아무 생각 없이 잔인한 수단만 사용한 악인 지도자에 종착한다.

<틴에이지 딕>의 공연 사진. 푸른 조명이 깔린 무대에서 휠체어를 탄 리처드가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치켜든 채 공상에 빠져있다. 그 옆에는 수어통역사가 있으며 무대 뒤편 중앙에는 클라리사와 에디가 리처드를 바라보며 서 있다. 자막 해설이 뜨던 뒷벽에는 자막해설과는 다른 폰트의 글씨로 공상에 빠진 리처드의 독백 대사가 영사되고 있고, 자막의 좌우로 내용과 어울리는 애니메이션들이 함께 영사된다.

본 공연은 ‘국립극장 기획 무장애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었다. 극장에 들어선 뒤 티켓을 받고 프로그램북을 넘기며 좋은 의미로 거듭 경악했다. 첫째론 페이지 수가 많은 프로그램북을 무료로 배포했기 때문이다. 보통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프로그램북은 유료로 판매된다. 프로그램북의 큰 판형, 큰 글씨, 빼곡한 점자 인쇄는 공연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등장인물 수와 수어통역사의 수가 같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공연 수어통역사 분들의 고충을 들은 적 있다. 이를테면 수어통역 시 소모되는 체력, 배우의 수는 많은데 수어통역사가 적은 경우, 교대할 시간이 없는 경우들에 대해서 말이다. 수어통역사는 퍼포머이기도 하지 않은가. 여태껏 본 공연 중 수어통역사의 수가 제일 많았기에, 열두 명의 퍼포머들이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마스크 안에서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기대하며 막이 오르길 기다렸다. 공연이 시작되면 등장인물과 같은 디자인의 옷을 무채색으로 입은 수어통역사들이 인물과 함께한다. 이들은 배우의 말을 통역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배우로 둔갑하여 군중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이크 루는 희곡 등장인물 소개에서 ‘리처드’와 ‘벅’ 역을 장애인 배우로 섭외할 것을 힘주어 썼는데,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다름을 ‘공존하는 다름’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무대는 뒤편부터 앞편으로 낮아지는 경사진 교실 마룻바닥 형태이다. 계단이 아닌 경사로 높낮이를 만든 무대에는 누구든 그곳을 누빌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리처드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무대 안에서 악인이 된다. 무대 제일 깊은 벽 중앙에는 미닫이문이 있다. 문 위쪽 벽은 자막해설이 투사되는 스크린으로 사용되고, 양옆 벽에는 등장인물의 심리 혹은 특징을 보여주는 영상이 투사되곤 한다. 뒷벽에는 자막이 다채롭게 영사되는데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화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역동적인 영상은 시선을 빼앗아간다. 때때로 배우가 발화하는 말보다 자막 영상이 앞서 나와 나의 들을 차례를 빼앗기기도 했다. 배우들에게 시선을 고정하려 애써야 비로소 그들의 말과 몸을 들을 수 있었다.

<틴에이지 딕>의 공연 사진. 앤의 연습실을 상징하는 발레바가 무대 중앙에 앞뒤로 길게 놓여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리처드의 옆얼굴과 뒷모습이 보이고, 그의 휠체어 뒤에 걸려 있는 빨간 가방에는 검은 악마의 날개 모양이 있다. 그 옆으로 수어통역사가 객석을 바라보고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있다. 무대 뒷벽에는 리처드의 독백 대사가 나오고 있고, 대사의 좌우로는 사전에 촬영한 리차드의 영상이 영사되고 있다. 한쪽에는 위아래가 뒤집힌 모습이, 다른 쪽에는 조금 더 클로즈업된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붙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이 공연은 리처드의 원탑 연극이다. 긴 시간 동안 리처드는 혼자 키득거리고, 방백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고, 극이 진행될수록 무대를 점점 넓게 사용하고, 학교 곳곳을 자유롭게 누빈다. 그는 음침한 모습, 친숙한 모습, 고민하는 모습, 사랑에 빠진 모습 등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며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찰진 개그 소유자인 벅과 전형적인 미국 하이틴 영화 남주 같은 에디, 리처드에 자신의 오빠를 투영하는 엘리자베스, 보수적인 종교관에 따라 살고 싶지만 억눌린 화가 불쑥 튀어나오는 클라리사, 개인의 아픔을 춤으로 이겨내고자 애썼지만 단숨에 이용된 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특정 대사를 앤이 말하게 한 것은 기만적이라고, 셰익스피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난 초등학생 때 했던 숙제처럼 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 “앤, 넌 좁아터진 촌동네에 사는 촌뜨기 여자애가 아냐. 넌 셰익스피어 연극에서처럼, 여자들이 전부 물건이고 주인공 보조고 극적 장치일 뿐인 연극에서처럼 단숨에 이용되고 나중에야 덧붙여지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포덤에 진학한 뒤 꿈꾸던 앨빈 에일리 무용단에서 춤추게 될 사람이라 전하고 싶다.
딱히 성악설을 믿지 않는 나는 희곡 속 대단한 악인을 볼 때면 늘 이해에 실패하고 만다. 이번 역시 완벽한 이해에는 실패했지만, 이 해결되지 않은 여백에서 <틴에이지 딕>은 계속 질문한다. 왜 장애인은 애초부터 출마 후보가 아닌 유권자로 상정되는지, 왜 리처드는 이렇게까지 고작 지루한 도시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일 뿐인 권력에 집착하는지, 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악을 향해 질주하는지. 극 중 리처드는 묻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나친 잔인함은 미움을 부른다고 말했는데, 만약 태어날 때부터 미움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그 잔인함이 유효한 방법일 때 멈추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틴에이지 딕>의 공연 사진. 휠체어를 탄 리처드와 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리처드는 빨간색과 검은색 줄무늬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운동화를 신었으며, 벅은 보라색 후드티 위에 연청 자켓을 걸치고 핫핑크색 바지를 입었으며 빨간 스니커즈를 신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벅이 리차드를 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고 있고, 리처드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자막에는 벅의 대사가 영사된다. “뭐 그러든가 뭐 나라고 너랑 둘이 끼리끼리 장애인 커플 하고 싶은 줄 알아”.

[사진 제공: 국립극장]

국립극장 기획 무장애 공연 <틴에이지 딕>
  • 일자 2022.11.17 ~ 11.20
  •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 원작 마이크 루 연출 신재훈 출연 하지성, 조우리, 김가린, 김소정, 김연수, 강해리 음악 이승호 안무 이재영 번역 함유선 드라마투르그 김지혜 무대 송지인 조명 김효민 영상 고동욱 의상 이윤진 소품 이수진 분장 장경숙 프로덕션 매니저 윤지원 접근성매니저 김현지 조연출 이현경 수어 통역 공인수어통번역 잘함[Jal:ham] 김도희, 이수현, 문은비, 김홍남, 조유나, 이은채
  • 관련정보 https://www.ntok.go.kr/kr/Ticket/Performance/Details?performanceId=266224
  1. 로얄셰익스피어컴퍼니(RSC)는 올해 10월에 올린 <리처드 3세>에서 리처드 3세 역할에 최초로 장애인 배우(Arthur Hughes)를 캐스팅했다. Alex Marshall, “The 'Most Real Richard III There's Ever Been”, The New York Times, 2022.6.24.
    https://www.nytimes.com/2022/06/24/theater/richard-iii-disabled-arthur-hughe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