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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술가에게 표현의 자유는 곧 생명이다

공공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글_임인자(독립기획자)
76호 2015.09.17
연출가 박근형, 그는 이미 2009년 연극 <너무 놀라지 말라>로 집안 화장실에서 목을 맨 아버지의 유언으로 가치와 윤리 상실 그리고 파국, 그 공포를 공표했다.

연출가 박근형, 그는 이미 2009년 연극 <너무 놀라지 말라>로 집안 화장실에서 목을 맨 아버지의 유언으로 가치와 윤리 상실 그리고 파국, 그 공포를 공표했다.

너무 놀라지 마라 : 파국의 무감각

자살율 1위, 치솟는 집값, 세금을 안 내려고 전세 사는 부자들, 국가장학금이라는 이름의 보조금으로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하고 건물 짓기에 바쁜 대학들, 10년 동안 터전을 닦아도 하루아침에 쫒겨나는 상인들, 치솟는 납부금에 3개월동안 아르바이트 를 해도 1학기 등록금을 못 버는 대학생들, 연극으로 28년을 지켜와도 월세로 쫓겨나는 대학로 어느 극장의 곡소리, 창문도 숨 쉴 구멍 없던 곳에서 세밀한 기타를 수공하느라 자신의 평생을 바친 기타 노동자들에게 미래 경영상의 이유로 회사 문을 닫고 해외로 도망친 회사와 그에게 손을 들어준 대법원, 자동차 판매 목적이 아닌 회사 팔기를 통해 자본을 얻기위해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그에 반대하는 해고자들은 26명의 자살과 가정파탄에 이어 지금은 곡기를 끊은 행위로 이어지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깨끗이 한다며 인간 청소를 자행했던 대감금의 역사, 세월호, 사라지는 죽음들, 해바라기 언론. 해고도 쉬워진 이때, 대통령이 월급 20%를 더해 청년실업을 해소하겠다는 더이상 믿기 어려운, 이 모든 밑바닥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홀로된 아버지와 작품만 하는 영화감독과 히끼꼬모리 둘째 삼촌을 먹여 살리며, 결국 악다구니로 주인공이 영화 장면으로 쓰라며 자신의 몸에 못된 짓을 했던, 그것으로도 ‘놀라지 못했던’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가치상실과 파국의 공포 속에 무감각으로 이미 그 몸을 담그고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산송장들이 지배하는 현실세계

2015년 초에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말이 들리더니, 급기야 몇 일전 Jtbc에서 들려왔던 뉴스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창작산실-우수 공연작품 제작 지원’ 사업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박근형 작가와 그의 전 작품 <개구리>를 지목해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선정되었던 심사 결과를 바꿀 것을 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문예진흥기금으로 운용되는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서는 심사위원이 선정한 102명의 작가 선정발표가 계속 미루어지더니 결국 70명이 선정되고, 32명의 작가는 탈락, 배제되었다.

풍자도 조롱도 그게 상급이건 하급이건 그게 어떻다고, 대통령 아버지, 그 이름 석 자 연상된다고, 삭제되고 거세되는 지금의 우리 예술의 현실. 내 생각을 바꾸라, 아니면 가만히 있으라, 그렇게 그대로 있어도 좋은지 그저 ‘너무 놀라지 말라’고 그는 이미 그렇게 경고장을 날렸건만, 그는 바로 그 삭제의 대상,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그것이 끝나고 논란의 자리라도 마련되면 참 좋으련만, 우리 시대는 이제 가상의 세계, 논란도 언론이라는 창으로, 연극의 세계는 상실한 채, 풍자도 이해 못 하는 이들의 난도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글자는 제 몸도 찾지 못한 채, 현실 세계를 떠돌게 되었다. 마치 이미 화장실에서 목 매 자살한 아버지를 묻지도 않고, 눈에서 흘러내리는 썩은 살 고름들을 그저 테이프로 임시로 발라놓고 그 악취는 마치 못 맡는 것처럼, 직권을 남용하고 헌법적 질서를 가차 없이 흔드는 일을 해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충성과 국가라는 권위에 기댄 예술행정가가 문장과 문장들이 제 몸을 찾았을 때의 파괴력을 감안하여, '예방'차원에서 '일반적'인 행위라며, 탯줄을 끊어 버린다. 자신들이 끊으면 타살이 될까 봐, 결국 '너무 놀라지 마라'고 안심시키던 아비처럼 예술가 스스로 제 손으로 그 탯줄을 끊어내라고, 억압으로, 그리하여 연출가 박근형은 그의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몸 찾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스스로 그 끈을 끊게 되었다. 그렇게 현실 세계가 산송장이 되었다.

긴급 상황, 공공의 적이라는 설정, 그리고 배제 : 누구를 위한 질서이자 예방인가

한 국가의 유지를 위해 수용과 포용이 아닌 배제의 원칙이 작동하는 질서의 세계를 목격한 것은 한두 해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독재의 문제, 유신의 문제, 학살의 문제, 감금의 문제, 그리고 최근에는 정치 검열과 다양성을 억압하는 기재들까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장치들이 어떻게 유린되어 왔는지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체제와 질서 유지를 위해 긴급 상황이 동원되고 공동의 적이 생기며 그것이 배제되는 모든 순환 구조에 민주적인 절차와 자유와 다양성으로서의 삶의 양식으로서 구현과 거리가 먼 권력의 체제와 질서 유지를 위해 그것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자유로운 사상과 가치의 표현 그리고 삶의 양식들이 존중받는 다양한 가능성이 무시되는 질서 유지란 결국 전체주의나 독재에 다름 아니다. 질서 유지를 위한 ‘긴급 사태’가 구현되고 그 안에 ‘공공의 적’이 탄생하며, 거기에 삶은 ‘배제’되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공공의 적’들은 혹은 ‘배제’의 대상들은 그렇게 동원되어 삶이 유린되고 결국 압사 당한다. 제거의 대상일 뿐, 억압되고 깔린 삶들이 도처에 널려있어도, 결국 향하는 곳은 권력 그리고 자본이다.

세금이라는 공공성 : 국가에 입맛에 맞는 행위를 하라는 의미가 될 수 없다

박근형 작품의 사전 검열과 강요 그리고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통해 알게 된 이윤택 작가를 포함 32명의 배제된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헌법적 질서를 문란케 하는 ‘직권 남용’ 및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예술과 학문의 자유로서, ‘표현의 자유’가 화두가 되어, 정치 검열을 즉각 중단하라는 요청이 거세다.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정신을 발화토록 하는 가장 근원의 권리로 단순히 입장을 표명하거나 발언하는 자유에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는 ‘연극계 내부의 권력 문제’로 치환하거나, 혹은 ‘독과점의 심화’로 본질을 흐리고도 있다.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예술 활동에 어떻게 대통령을 거론하느냐는 ‘듣보잡이들’의 말도 있다. 거기에 더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예술계 편파 지원 논란에 대한 예술위 입장”이라는 공식적인 언론해명에서 ‘사회적 논란 예방 등 사업 추진에 있어서 일반적인 유의사항을 지시’했다는 이 중차대한 사한에 대한 무감각의 절정 그리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지원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고려하는 것은 공공기관의 의무’라며, 지원의 의미와 세금이라는 공공성의 영역을 한참을 뒤로 후퇴시켜놓았다.

예술지원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절실하며, 독립적인 자금 확보가 중요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으로 국고를 통해 예술진흥을 하는 기관임에 앞서 엄연히 1973년 문화예술진흥법에 의거 탄생하였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전신으로 하는 국가의 유일한 문화예술지원기구이다. 지금은 지역자치단체 산하의 문화재단 등이 신설되었으나 이는 서울과 수도권에 대한 문화편중 및 지방자치제도의 활성화와 함께 2000년대 후반 지역문화진흥을 위한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만큼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국가단위의 예술형식 그리고 지역의 맥락과는 다른 예술 그 자체를 다루는 순수예술지원기관으로 그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 운영에 있어서도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통해 독립적인 자원으로 운영되던 것이 2004년 일몰법으로 기금 징수에 대한 법률안이 없어지고, 심지어 2016년에는 그 기금이 모두 고갈되는 상황으로 그 자율성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정권의 입맛에 맞춰, 예술지원기관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버린 채, 예술의 특수성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술 창작 활동을 ‘사회적 합의’ 등으로 언어도단하는 것은 ‘예술’과 ‘창작’의 본질에 대한 직무 유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기관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만이 국민이 문화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스스로 “예술로 세상을 바꿉니다-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통해 국민이 문화로 행복한 세상을 아르코가 만들어 가겠습니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스스로 이 미션을 저버렸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저해하는 사전 검열 행위는 그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공식적인 사과와 재발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약속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스스로 예술을 도구로 삼지만, 정치가 예술을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독재의 길이요, 전체주의, 파시즘의 길이다. 지금 현 시대는 예술가들에게 독일 나치정권에 부역했던 괴벨스가 되라고 주문을 넣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모순 앞에 침묵하라고 주문을 넣고 있는가.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율성은 곧 생명이다. 그런데 국가에서 이 생명의 줄을, 그 탯줄을 끊고 있다. 그것을 끊으면서도 어떤 행위를 했는지 모르는 것을 다만 무지라고 부르지 않겠다. 그것은 범죄다. 생명을 끊어버린 죄. 유리 상자에 넣은 균질화 된 예술이 하얗게 분칠을 하고 있는 동안 예술가들의 피울음이 세상이 모를 듯 싶은가. 예술의 생명줄을 끊지 말라. 배도 고픈데, 정신까지 끊으며 검열하고 스스로 눈치 봐야하는 삶이라면 그건 노예이지, 존재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예술이 희, 노, 애, 락을 불러일으키며, 다양한 감각과 논쟁과 생각들을 교환하는 동안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결국 관객이자, 시민이므로. 그들에게 ‘너무 놀라지 마라’며 예술가들이 죽은 송장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