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염치 권하는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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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모 기관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북미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저렴한 항공권을 급하게 구해야 했던 상황에 북경을 경유하는 모 항공사 항공권은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항공사 후기에 다소 경계하긴 했으나, 별 문제 없이 슥- 도착했다.
문제는 돌아올 때였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두 시간 동안 항공편이 연기가 되더니 네시 간쯤 지나자 역시 별다른 설명 없이 취소안내가 났다. 무심한 듯 시크한 이 항공사의 부스에 아니나 다를까 수백 명의 승객들이 몰려들어 성토하는 광경은 뭐랄까,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풍경이었다. 줄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몰려들어 항공사 직원들에게 항의하는 승객들 덕에 한 시간을 더 줄을 선 끝에야 들은 얘기는: 기체 결함이 발견돼서 취소됐음, 후속조치는 추후공지, ‘식권 줄께 밥 먹으면서 기다리셈.’ 다섯 시간 만에 알게 된 상황은 그게 다였다.
영화 <터미널> 중 주인공이 JFK 공항에서 노숙하는 장면
공항을 배경으로 하는 코미디 영화1) 하나 찍으면서 여섯 시간이 더 지나 또 긴 줄을 서서 들은 얘기는: ‘기체 결함을 수리해서 다시 띄울 거임, 근데 언제 다 수리할지 모름, 식권 또 줄께 또 밥드셈.’ 수백 명의 승객들은 자국어로 항공사직원과 고함을 지르고 성토하고 설명을 듣고 하는데, 우리가 들은 영어 정보는 이게 다였다. 비행기가 자전거도 아니고 수리라니, 자동차 타이어 펑크 때우는 것도 아니고 수리해서 다시 타라니, 이게 재난영화2)였다니!
영화 <데스티네이션> 중 비행기가 폭발하는 장면
소심하게 영화나 찍고 있던 나하고 달리 마침내 인내심이 폭발한 동행인이 드디어 출동했다. 우리는 중요한 비즈니스 여행 중이고, 대체항공편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이렇게 무책임하게 방치해서 우리 비즈니스에 지장이 발생한다면 그 막대한 손해배상은 항공사에서 져야 할 것이다. (같은 답변 반복) 너 말고 네 보스 불러라 (다른 사람이 와도 똑같은 말) 너 말고 결정권자를 불러라 등등. 오오, 생각해보니 유학파 출신이었던 동행인이 표정하나 안 변하고 ‘개뻥’을 치면서 책임자를 족치는 모습은 뭔가 또 다른 장르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공항체류 15시간 만에 책임자가 은밀히 우리를 불렀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인천행 한국 국적기편을 알아보고 있다. 헌데 자리가 날 지는 확답할 수 없다. 일행이 몇 명인가.
한치 앞의 정보도 모르는 상태에서 재난 영화를 찍어가면서 머문 터미널에는 우리와 상황정보 공유를 위해 계속 이야기를 나눴던 두 명 말고도 한국 사람이 여남은 명 더 있었다. 말은 안 섞었지만 분명히 인천이 목적지일 승객들이었다. 난리를 쳐야지만 제한적으로 상황이 열리는 이 전쟁 같은 상황에서 흥남 피난함 같은 존재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는데 이걸 다른 인천행 승객들에게도 알려야 하나, 그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본다. 15시간 동안 같은 터미널에서 같은 상황을 맞아 같이 진이 빠진 사람들이다. 영화는 또 장르가 달라졌다.
흥남에서 1950년 12월 23에 출발한 마지막 피난선
최대한 빨리 이 공항에서 뜰 수만 있으면 뭐든 상관없다. 일행은 네 명이다.
집 떠난 지 3주 만에 본래 구매한 항공권의 1.5배 가격인 직항 편 국적기의 편안한 모국어 서비스를 받노라니, 16시간 동안 공항에서의 악전고투 대신 한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기껏해야 하루 머무는 거였다. 이 편이 아니더라도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묵은 후 다음날 아침 다른 직항도 있었을 것이다. 아님 펑크 때운 비행기 타고 북경 들렀다가 오는 수도. 그런데 그 순간 그 수많은 시선들을 외면하고 ‘우리만’ 피난선에 올라탔다. 정말로 전쟁일 필요도, 정말로 흥남을 출발하는 마지막 피난선일 필요도 없었다. 이웃을 외면하고 나만 편안하려 줄 서는 데는 내 머릿속 영화만으로 충분했다. 사실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인천공항에서 나머지 여남은 명의 한국 승객들을 마주쳤다. 하지만 끝까지 말은 섞지 않았고, 눈을 맞출 수도 없었다.
염치.
영화 <혈의 누>중 한 장면
조선 후기 어느 외딴 섬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2005년 영화 <혈의 누>3) 는 탄탄한 스릴러 장르성과 표현적으로 폭발하는 절정장면으로 한국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는 사람에게는 알음알음 엄청 회자된 이 영화의 감독은 이 영화로 “염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대의나 양심, 뭐 이런 거창한 주제나 훈계가 아니라 바로 그 “염치”이다.
- 3)
- <혈의 누> 김대승 감독, 차승원 박용우 주연 스릴러, 범죄영화. => 바로가기
염치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a.k.a. “사회지도층”)에게서 보이는 행동 특성으로 보건데, 이 사회는 염치가 없어야지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다. 염치라는 게 쓸 데 없이 남의 눈 의식하고 체면이나 차리는 것 같고, 1988년 쌍문동에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21세기 소녀소년들은 뭔가 효율적이고 실용적이면서 창조적인, 뭔가 창조경제스럽고 뭔가 스티브잡스적인 저돌성이 미덕인 것도 같다. 시크하게 서로서로 염치 생략하는 게 요즘 트렌드 아닌가.
하지만 염치가 없어진 덕에 우리는 줄만 잘 서면되는, 수저만 잘 물면 되는, 남의 아픔을 외면하는, 혹은 그 아픔을 감정적 구경거리로 이용하는 뭔가 시크하고 트렌드세팅 하는 사회에 살게 됐다. 생각해보니 사회가 벼랑 끝으로 몰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최후의 안전장치는 호빗들이 뛰노는 북유럽의 복지제도도 아니고, 로보캅이 쌍권총 돌리는 미국의 공권력도 아니고, 바로 그 ‘염치’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공연이라는 게, 예술이라는 게 사회의 그 ‘염치’를 담당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없어도 살 수 있고, 때로는 없는 게 더 효율적이고 속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사회의 마지막 안전장치일 지도 모른다. 창작의 자유라는 건, 어쩌면 사회가 그 염치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가장 염치를 지켜야 할 사람이 창작자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