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열의 리플레이]
열린 문화교류와 그 적들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기사를 접었다.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문화교류에 대해 기사를 작성할 예정이었다. 남다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문화를 끌어들이는데 있어서 정교했다. 결과물이 궁금한 교류 프로젝트가 많았다. 이런 원숙한 문화교류는 자세히 소개해서 앞으로 다른 국가와의 교류할 때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문화교류 프로그램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았다.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기사를 접은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이 관심을 보인 프랑스 장식미술사 기획전을 거부한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경질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장식미술관과 프랑스 명품업체들의 연합체인 콜베르재단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프랑스 장식미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기를 원했다. 전시 비용은 콜베르재단 소속의 명품업체들이 부담할 예정이었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은 이 전시가 박근혜 대통령의 관심사항이라고 김 관장에게 성사시킬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김영나 전 관장이 이 전시를 거부한 것은 프랑스 명품업체들의 꼼수 때문이었다. 별도 전시로 카르티에, 루이뷔통, 에르메스 등의 명품업체들이 현재 시판 중인 고가의 장식품을 별도로 진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프랑스 사치품의 홍보성 전시를 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전 관장의 이런 판단은 존중받지 못했고 그는 전격 경질되었다.
정부가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교류 사업에 끼어든 사례는 더 있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열린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세미나’가 대표적이다. 한국 정부가 후원하는 이 세미나에서 동국대 영상대학원 차승재 교수는 발제자로 예정되어 있었다. 프랑스 쪽 담당 교수에게 영문 발제문까지 보낸 상태였다. 그런데 정부기관으로부터 정부에 비판적인 차 교수가 포함되면 행사를 지원할 수 없다는 압박이 들어왔고, 결국 차 교수는 자진 하차했다. ‘한·불 상호교류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부문별 자문위원을 구성할 때도 정부에서 특정인을 빼라고 해 논란이 되었다. 영화 부문 자문위원이 <다이빙벨>을 상영한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랑스 영화 프로그래머 이수원 씨였는데 그를 제외하면서 이후 자문위원단이 아예 해체되었다고 한다.
기사를 접으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프랑스의 국민안무가 조세 몽탈보와 우리 국립무용단이 공동 제작한 무용작품 <시간의 나이>를 소개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피나 바우쉬의 <러프컷>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우리 한정식 한상 차림을 프랑스 코스요리로 재배치해 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춤의 구성요소를 해체한 후 이를 현대무용으로 재구성했다. 우리 음식을 서양 식기에 담아 코스요리에 내놓았는데도 손색이 없는 것처럼 우리 춤이 현대무용으로도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살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만족시켰다.
조세 몽탈보가 강조한 우리 춤의 특징은 타악기를 들고 연주하면서 춤을 춘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포착한 이런 특징을 작품에 녹여냈다. 우리 춤에 대해서 외부자의 시선으로 자각할 수 있는 계기였다. 또한 서양 춤과 우리 춤의 차이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서양 발레는 수직 지향적이다. 발레리나는 하늘을 향한다. 하지만 우리 춤은 수평지향적이다. 우리 무용수의 손은 수평을 가른다. 또한 서양 춤이 움직임을 강조한다면 우리 춤은 멈춤에 방점을 둔다. 이런 차이를 보여주었다.
<시간의 나이>는 전체적으로 한국 춤에 대한 분석, 우리 무용수에 대한 존경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아마 이번 작품을 함께 한 무용수들이 재밌어 했을 것이다. ‘춤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몸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근원적으로 성찰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몸을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여서 감정을 표현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무용이라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위정자들의 분탕질 때문에 이런 공연을 소개하지 못하고 지나간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