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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어떤 기억

박해성_연출가
90호 2016.04.21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개봉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장편 애니매이션 <공각기동대>는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국가와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자기 보존형 소프트웨어 “인형사”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터넷 상에서 자의적으로 진화, 확장하...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개봉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장편 애니매이션 <공각기동대>는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국가와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자기 보존형 소프트웨어 “인형사”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터넷 상에서 자의적으로 진화, 확장하며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흔적도 없이 네트워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번번이 인간들을 무력하게 만들던 인형사는 예측하지 못한 순간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며 자신을 네트에서 태어난 생명체라고 주장,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 당황한 인간들이 실체 없는 인형사의 인격을 부정하자, 인형사는 인형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컴퓨터로 인해 기억의 외부 저장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 의미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공각기동대(攻殼機動隊, Ghost in the Shell: 1995)>의 “인형사” 장면 캡처

아, 뭔가 의미심장한 얘기같지만 정확하게 무슨 얘기인지, 무슨 생각을 진지하게 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기억을 간직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어쩌면 기억을 저장 혹은 전달하는 방법을 만들어내 다음 세대에 그 기억을 전달해옴으로써 우리가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이 된 것일 수도 있겠다. 뭔가 그럴듯 하니 더 가보자면,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되게 만드는, 그래서 각각의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하다는, 그러니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함을 증명하는 바로 그 ’인격’이란, 어쩌면 바로 그 사람이 간직한 기억의 총합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인형사가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우리와 대화를 나누거나 같이 바둑을 둘 정도의 인격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그런데 “컴퓨터로 기억을 외부에 저장한다”는 말이 걸린다. 기억을 저장하는 거라면 라스코동굴에 그래피티하던 시절부터 있어왔던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사람이 ‘기억’을 저장할 순 없다. 기억을 더듬거려 그림을 그리거나 손가락이 부러져라 글을 써도, SNS에 죽어라 내 일상을 올려도, 그건 기억이 아니라 기억을 요약(추상)하거나 선별하거나, 심지어는 왜곡한 결과물일 뿐이다. 사람의 기억은 결코 온전하게 보존될 수 없는데 컴퓨터(연산기술)와 저장기술이 발전해 뇌를 온전히 외부에 저장할 수 있다면, <공각기동대>에서처럼 “전뇌(電腦)”가 가능하다면, 어제 3차에서 먹은 안주도 기억 못하는 나 따위의 인격과 대화하면서 바둑 두는 전뇌는 꽤나 따분해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억의 의미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슬슬 오고 있는 거 아닌가. #어차피 #바둑은 #포기

얼마전, 온 인류가 마음을 모아 터미네이터에 저항하던 바로 그 ‘바둑시즌’에 <인공지능시대에 사라질 직업>이라는 예언서적 타이틀의 기사가 우리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정작 기사 내용은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분석한 “자동화대체확률 높은(낮은) 직업”리스트였는데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과연 같은 개념인지와는 별개로- 나 역시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 찾듯 마른침 삼키며 내 직업을 대입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예술 창작 직군은 대체확률이 낮은 직업으로 손꼽혔다. 수입이 가장 낮은 직종으로 항상 손꼽히더니, 사라지지 않을 직종으로도 손꼽힌다. #고오맙다 #영원한 #가난

라스코 동굴, 프랑스, 벽화는 17000년 이상 이전에 제작 추정(출처: nationalgeographic.com)

그런데 그 예술이라는 게 그 근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을 연장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우리의 어떤 소망을, 감정을, 상상을, 그것의 총체인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력으로 그림이건 글이건 남기게 된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공연은 어떨까. 공연은 어차피 사라지니 기억의 기록과는 상관없는 것일까. 어디서 주워들은 공연의 ‘제의기원설’을 받아들이자면, 제의라 함은 그야말로 기억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제의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이다. 보이지 않는 신, 혹은 한때 우리 눈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제의였을 것이다.

허나 무슨 아이러니인지 몰라도, 기억의 의식인 제의는 망각의 의식인 연극으로 진화했다. 우리는 극장이라는 안락한 공간에 들어서며 현실을 잊고, 무대 위 새로운 세계에서 펼쳐지는 비극의 향연에 가슴절절하게 슬퍼한다. 안전검사를 거친 롤러코스터이기에 우리는 공포와 연민을 만끽한다. 비극의 세계는 연극과 함께 안전하게 끝이 날 것이고, 고상한 슬픔, 우아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화된 우리는 극장을 나서 치맥을 먹으러 갈 것이다. 우아한 슬픔이 소비되는 게 비단 극장에서 뿐이랴. 고상한 분노와 안전한 혁명이 소비되는 게 비단 인터넷에서 뿐이랴.

다시, 그 날의 기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그 날, 그 다음 날, 그 몇 달 동안 우리 모두는 충격 속에 있었고, 고통스러웠다. 이게 안전한 극장에서 펼쳐진 일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2년이 지났다. 만약에 기억의 외부 저장이 가능하다면, 그 기억을 온전하게 돌이킬 수 있다면, 그 기억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감정이입한 슬픔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고통일 것이다. 우리가 극장에서 그 기억을 다룰 때, 인터넷에서 그 기억을 나눌 때, 그 기억이 우아한 슬픔인지 통렬한 고통인지 다시 따져 볼 일이다. 그것이 만약에 통렬한 고통이라면, 극장에서 나오는 것만으로 그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내야 할 것이다. 그게 제의이건 예술이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리고 그 고통을 끝내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게 예술이건 정치이건 무슨 수를 써서든.

ⓒ이상엽(출처: 프레시안, <그로부터 1년, 팽목항에서>
http://www.pressian.com/news/imagepressian/detail.html?no=125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