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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오프사이드

박해성_연출가
92호 2016.05.26
“손발이 오그라든다”, “노잼”, “오덕후”, “킹왕짱”, “신상털기” 라는 표현의 공통점은? 신조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게 오래되고, 은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게 이미 의미가 보편화된 용어이다. 오죽하면 그 엄숙한 방송통신윤리위원회의 심의규정을 준수하는 공중파 TV방송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할 정도이다. 이미 만들어진지...

“손발이 오그라든다”, “노잼”, “오덕후”, “킹왕짱”, “신상털기” 라는 표현의 공통점은? 신조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게 오래되고, 은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게 이미 의미가 보편화된 용어이다. 오죽하면 그 엄숙한 방송통신윤리위원회의 심의규정을 준수하는 공중파 TV방송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할 정도이다. 이미 만들어진지 15년 이상 된 이 용어들은 놀랍게도 단 하나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시작돼 퍼져나갔는데, 바로 그 유명한 ‘디시인사이드’이다. 고상한 이 지면(화면)에 인용하기위해 그나마 얌전한 표현들만 엄선한 바, 실제 그 사이트에서 시작된 신조어들을 모두 나열해보면, 이번세기에 대유행한 언어들 거의 대부분이 해당된다. 이 쯤 되면 언어의 생산 공장, 언어의 아방가르드 , 언어의 창조경제, 언어의 문화융성이라 부를 만 하다.

“손발이 오그라든다”의 진화사례. 이말년 작 웹툰 <힙합베짱이> 중 한 컷.
(출처: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03759&no=40)

요즘이야 트위터나 인터넷 방송 등 여러 매체를 드립력 각축장으로 꼽지만, 그 시절 강호의 난다 긴다 하는 창조잉여들은 익명이 보장되는 디시인사이드에 모여 하루종일 F5(새로고침)를 누르고 있었다. 누군가 게시물을 올리면 수만명이 달라붙어 댓글을 한 숟갈씩 얹었고,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게시글과 댓글이 서로 부딪히고 합쳐져 촌철살인의 시적 언어, 고도로 압축된 소통문화를 창조해냈다. 따지고 보면 예술이란 게 별건가. 그것 없이도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 없는 잉여 아닌가. 뭔가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에 대해 누가 더 새롭게, 누가 더 기발하게 댓글 한숟갈 얹나 배틀 붙는 거 아닌가. 모든 작품이 엄숙하고 고상하진 않을 것이고, 모든 작품이 아름답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다양하고 많은 작품들이 서로 부딪히고 비웃고 자극받고 감탄하면서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예술과 표현에 대한 검열이 문화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해친다는 점은 국정교과서에도 나올만한 이야기이다. 더욱이 행정권에 의한 검열은 헌법으로도 금지(제21조, 22조)되어 있다.

2015년 1월, 한예술, 한문화 한다는 프랑스에서 한풍자, 한조롱 한다는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의 파리 시내 본사건물에 대한 충격적인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관 2명과 샤를리 에브도 직원 등 모두 1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 사람도 많고 눈도 많은 구라파의 중심도시 시내 복판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인데다 종교적인(이 잡지의 만평이 이슬람의 신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언론사에 직접 가한 표적 공격이라, 세계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분노했고, 이 사건의 희생자들과 샤를리 에브도는 언론 자유의 수호자로 추앙됐다. 소셜미디어에 “내가 샤를리다(JeSuisCharlie)” 해시태그나 메세지를 남기는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예술과 표현의 자유는 그 어떠한 이유로도 침해받을 수 없”고, 특히나 “테러는 그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널럴하고 유연한 잉여로 시작한 표현의 자유가 어쩌다가 이렇게 단호한 진리가 되어버렸을까. 그렇게 딱딱한 고딕체로 지켜내야 하는 표현의 자유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테러로 무 자르듯 명백하게 규정될 것 같은 그 사건에 대해 사실 다양한 관점의 까다롭고 어려운 논란이 있어왔다. 우선, 문제의 그 만평이 폭력과 혐오에서 기인했으며, 그래서 또 다른 폭력과 혐오를 불러일으켰다는 관점이다. 만평과 무차별 총기살해가 어떻게 같은 선상의 폭력으로 놓일 수 있는지는 대응논리로 꾸준히 등장했고, 그것이 전세계의 미디어 권력을 쥐고 있는 서방권의 세속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 관점일 뿐, 이슬람권의 종교적 세계관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대상화시킨 논리라는 관점도 비서방권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테러는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단골 논리는 서방권이 그간 분쟁지역 민간인에 가한 폭격 등의 공격은 테러로 규정하지 않는, 헤게모니 장악을 이용한 위선이라는 논리와 늘 첨예하게 맞서왔다. 연관관계가 어찌 되었건 만평은 출판되었고, 총기는 난사되었으며,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이후로도 이슬람권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대변하는 극우세력은 유럽 내에서 점차 득세하고 있다. 유럽은 이제 상시적인 테러위험지역이 된 지 오래다.

2015년 11월 파리에서 발생한 연쇄테러로 130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다.
(출처: euronews.com)

“여혐(여성혐오)”은 작년부터 인터넷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신조어이다. 이십여 년간 인터넷에는 유달리 여성을 대상화한 표현(“XX녀”는 언론사에서도 자연스럽게 쓸 정도로 보편화된 용어이다)이 많았다. 현실의 젠더문제가 인터넷상에서 논쟁이 되면서 인터넷 언어계의 특성상 더 창조적으로 지독한 표현들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왔다. 이제는 온/오프라인을 망라하는 혐오폭력의 레전설로 자리잡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가 디시인사이드 게시판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자극적이었던 “일간베스트”게시판에서 독립한 스핀오프 사이트라는 사실은, 그 지독한 표현의 창조경제스러움과 문화융성함이 어디서 기인한지를 설명해준다. 일군의 여성들은 미러링(mirroring: 당연하게 여성을 대상화한 표현들에서 남/녀의 젠더를 단순히 바꾸어 대입하는 방법)전략을 통해 이 사회에 여성혐오 현상이 있음을 드러냈고,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대상화에 자극받은 남성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여혐”을 만들어냈다. 전선은 더욱 자극적으로 확장되고, 프로댓글러들은 각자의 관점과 무기를 들고 이 치열한 문화융성에 참전했다.

얼마 전, 서울의 도심 한가운데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연관관계가 어찌 되었건 범죄현장을 스쳤던 다섯 명의 남성은 당연하게 살아남았고, 유일한 여성은 당연하게 희생됐다.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육체적 비대칭과 폭력에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사건현장 인근 지하철역 입구에는 “현실댓글”이 붙기 시작했다. 그동안 대상화된 삶을 살아온 수많은 여성들에게 상존하는 공포와 공감이 줄을 이었고, 본인이 그 대상화의 암묵적 주체였음을 각성한 남성들의 추모도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일베 이용자는 동등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발랄하고 깜찍한 분홍색 코끼리의상을 입고 현장에 나타나는 아방가르드한 추모로 기어이 관심을 얻고야 말았다.

혐오가 유발되건 폭력이 발생하건 표현의 자유는 유유자적 고매하게 지켜져야 하는가. 표현의 자유는 왜 지켜져야 하는가. 모두의 동등한 자유를 위해서인가, 자유의 비대칭을 보정하기 위해서인가. 모든 표현이, 모든 예술이 엄숙하고 고상할 필요는 없고, 아름답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혐오와 배제는 표현과 예술에 있어서 자극적이고 매력적인 소재이고, 반응 또한 뜨겁게 마련이다. 창작자가 무슨 어벤저스라고 공공선에 대해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책임져야 하나, 표현과 예술에 대한 자기검열 또한 문화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해친다는 점도 교과서 어디에 나올만한 이야기 아닌가. 답 없는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혐오와 배제는 계속될 것이고, 폭력은 끝없이 강화될 것이다. 이쯤 되면 그 옛날 어느 파리의 택시운전기사가 소개하신 (알고 보면)살벌한 룰이 떠오른다. 모든 가치는 공존을 보장받는다. 공존을 부정하는 가치를 제외하고.

강남역 지하철역.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