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예술하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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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MI-6, 미국의 CIA와 더불어 전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갖췄으며, 국정원에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 인터넷 파급 및 댓글 유발력을 갖춘 능력자 어벤져스, “디스패치”가 또 한번 인류를 놀라게 만들었다. 다양한 부문의 유명인들이 치는 이런 저런 사고는 사실 놀라울 일은 아닌데, 디스패치의 집요한 취재력만큼은 매번 명불허전이다. 이번에는 대형 기획사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 “독립예술을 지켜낸” 어느 연예인의 오래고 두터운 팬층 조차도 지지를 철회할 정도로 자극적인 내용이다. (사법기관에서 다룰 범법사실과는 별개로) 유명인의 파급효과를 감안한 엄격한 도덕률과 개인의 프라이버시 사이 어딘가에서 어디까지 이 뉴스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야 할 지 0.1초 정도 고민해 본다던가, 이 뉴스가 덮는 더 중차대해 보이는 뉴스들에 대해 0.2초 정도 되짚어 보는 것까지도 이제 습관적이고 자연스러운 단계라 할 수 있겠다.
디스패치 소개 글. 무슨 말인 지 이해 되는 분은 댓글로 설명 부탁드림
(출처: http://www.dispatch.co.kr/dispatch)
성매수자, 유흥업소유저, 성희롱/성폭력자, 여혐자, 상습도박자, 외환관리법 위반자, 음주운전자, 불륜자, 문어발연애자들은 우리 주위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유달리 연예인의 그런 행위에 더 준엄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는가.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가 굳이 더 격렬하게 반응 한다기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노출된 직업 특성상 한 사람의 반응은 소박하나 그것이 모이고 모여 타겟 입장에선 극딜(집요한 공격)이 될 순 있겠다. 그런데 가만, 역시 대중에게 노출된 직업인 정치인은 범죄나 물의를 일으켜도 연예인만큼 극딜 당하진 않는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정치인에게 도덕적인, 가치상 엄밀함이 요구되는 게 당연하다. 허나 정치인은 “허리를 한차례 툭 쳤을 뿐, 엉덩이를 움켜잡지 않았”고, “공소 시효가 지났으니 무죄”이다. 심지어 한 도시에 군대를 풀어 줄초상을 내놓고도, 단돈 30만 원으로 20년간 실버라이프를 즐기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기도 한다. 우리가 연예인에게, 정치인에게 바라는 바가 어떻게 다르기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는 안다. 정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날을 맞기엔 이번 생은 글렀지만, TV를 틀면 우린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나라 군대는 어느 남쪽 나라에 파병되어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정작 지켜야 할 자국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거나 7조짜리 초호화 침대를 갖춘 병영 내 폭력과 의문사로 얼룩져있지만, TV속 군대는 장교와 부사관이 상호존대를 하며, 있지도 않은 우르크라는 나라에 파병돼서 “여자와 노인과 아이를” 지켜낸다. 현실에선 남자가 화장실에서 여자를 살해하지만, TV에선 남자가 여자를 벽에다 밀치고 팔을 움켜쥐어도 “심쿵”할 뿐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드라마를 보며, 영화와 연극, 뮤지컬을 보며 행복해지거나, 위안을 받거나, 희망을 가지거나, 어쨌거나 현실을 잊는다. 그러니 다음 생에서야 경험할까 말까 한 그 행복을 지금 느끼도록 도와주는 이들을 애정할 수밖에. 그러니 그토록 애정하는 이들에게서 지긋지긋한 현실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학을 뗄 수밖에. 애정과 증오는 종잇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던가.
현실을 잊게 하는 예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예술가는 집요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의 모순을 파헤친다. 어떤 예술가는 현실에서 희망을 찾아내 보여준다. 어떤 예술가는 희망을 깨버리고 절망에서 우리의 본질을 찾는다. 어떤 예술가는 더 나아가 “나의 가장 나중 지니어야 할” 삶의 태도와 행동,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해준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에 대해 ‘애정’을 넘어 ’존경’까지 보낸다. 어느 샌가 우리는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길을 찾게 되었고, 어느 샌가 세상을 응시하고 지켜내는 것이 예술의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 되었다. 어찌 됐건 이 사회에서 고군분투 하는 관객들과 눈 맞춰 예술하며 애정 받으려면, 그렇게 예술은 우리의 팍팍한 현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며, 동시에 희망을 깨버리고 본질을 찾으며, 즐거움을 주고 슬픔을 주며,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대안까지 깨알같이 제시하며, 부당한 권력에는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우고 심지어 “시대의 정신적 희망”까지 돼야만 한다. 아, 이 땅에선 예술질 하기도 힘들다.
권리장전 검열각하 공동성명 낭독
(출처: 권리장전 검열각하 페이스북 페이지, 촬영: 김명집)
우리는 정치인을 ‘애정’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리와 같은 지리멸렬한 삶 위에 있는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때로는 누군가 스타처럼 나타나 이번 생에 현실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지 모른다는 격한 희망에, 어떤 정치인을 연예인처럼 ‘애정’하기도 한다. 허나 이 애정은 여러모로 더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이 너무나 격한 나머지, 그 애정으로 인해 해당 정치인의 과오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과오를 보고도 그것을 과오로 인정하지 않는 인지부조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 스타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내 희망도 부정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TV 앞 행복이 부정당하는 것은 참을 만 해도, 현실에서 올 것만 같았던 행복이 부정당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누가 뭐래도 그 분이 하는 일은 다 옳고, 누가 뭐래도 그 분은 내가 지켜내야만 한다. 근데 그 분이 정치인이다. 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가. 이에 비하면 “디스패치의 팩트”가 가리키는대로 연예인 극딜하는 건 차라리 건강하다.
혼란스럽고 고단한 삶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앞에 등대 하나쯤 나타나길 기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TV이건, 예술이건, 정치이건, 누군가 우리에게 희망을, 길을, 답을 제시해주기를 목빼고 기다리는 게 우리이다. 그런데 어쩐다, 예술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정치가는 우리가 선거로 만들어 낸 거울상이다. 우리가 등대를 원해서 등대처럼 보이는 것일 뿐, 예술가, 정치인 역시 혼란스럽고 답 없긴 마찬가지이다. 예술과 정치에 내 희망을 건다는 건, 눈 가리고 서로 의지하여 길 찾는 격이다. 결국 그 자체로 빛을 발하며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는 ‘스타’는 종교의 영역에서나 있을 뿐, 이 땅 위에 나를 구원해줄 스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 길은 우리 자신이 찾는 수밖에 없다. 그 방향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 자신과 주위의 부도덕을 찾아내고 고쳐가며, 우리 삶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번 생에는 좋은 세상 구경할 리 없겠지만, 지금 이렇게 우리 힘으로 헤매봐야 그나마 다음 세대에라도 가능성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럼 그 동안 예술은 무얼 하나. 예술가도 우리이기에, 우리와 똑같이 헤매고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며, 때로는 포기하고, 절망하고, 오류를 인정하고 고쳐가며, 가끔 궁서체로 뜬금없이 우리 내면을 얘기하고, 때로는 에라 주저 앉아 쉬자고 즐겁게 “예술하고 자빠질”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 뭘 하든, 예술은 우리 주위에서 맴돌며 우리가 헤매는 동안 외롭지 않게 함께할 것이다. 예술이 별건가.
음악가 ‘이이언’의 트윗 캡처(출처: https://twitter.com/eaeon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