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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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휴가철이다. 장대비 아니면 불볓더위를 오가며 기진맥진한 채 열어본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에는 각종 여름휴가 염장짤이 난무하고, 한번쯤 꿈꿔봤던 불란서의 낭만적 여름휴양지 니스에서는 대형트럭으로 인파를 공격해 수십명을 살해하는 테러가 발생했고, 동서양을 아우른 신비로운 여행지 이스탄불의 밤거리에서는 장갑차가 질주하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나고 시가전 끝에 진압됐다. 유럽 어느 거리에서 휴가를 즐기는 누군가의 염장짤과 니스의 어느 거리 트럭 앞유리의 총알구멍들과 이스탄불의 어느 다리 위 장갑차 사진들이 삼복더위 속 우리의 스마트폰 화면에서 기이하게 공존한다. 장대비 아니면 불볓더위를 오가는 여름, 이 세계는 초현실이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이상하게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속초에 몬스터가 나타났대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요즘 격렬하게 재평가받고 있다는 44번 국도의 어느 이정표
이 난리통인 세계에서 “포케몬 고”라는 게임이 천연덕스럽게 큰 히트를 치고 있다. GPS 좌표에 심어놓은 가상의 몬스터들을 이용자들이 실제로 그 지역을 뛰어다니며 스마트폰 단말기로 잡아내는 게임이다. “가상”의 몬스터들을 “실제”로 뛰어다니며 잡아낸다는 말부터가 초현실적인데, 여기에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이라는 개념이 숨어있다. 보통 우리가 유리창이나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볼 때 유리나 카메라라는 매개를 통해 본다는 사실을 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기술적으로 그 유리나 디스플레이에 이런 저런 정보를 더함으로써 현실에 그런저런 정보가 더해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질 수록 그 느낌은 현실적이 되는데, 얼굴에 고양이 수염 그려주는 카메라어플이나 드래곤볼의 스카우터를 닮은 구글글라스나 뭐 그런 게 주는 그 ‘느낌’을 현상적인 현실로 받아들인 개념이 증강현실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게임일지언정, 속초행 고속버스는 매진이고, 발에 땀나도록 거리를 뛰어다니는 이용자들에게 속초는 인제 신남이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뭐가 현실이겠는가.
사실 증강현실은 이미 유행한 적이 있다. 7년 전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세카이 카메라’라는 앱은 거리의 어떤 가게를 카메라로 비추면 그 가게의 정보와 거기 들렀던 이용자들이 남긴 댓글이 주루룩 뜨는 류의 앱이었는데, 내 눈에 보이는 현실에 이런저런 자세한 정보가 더해지는, 뭔가 터미네이터 느낌의 공각기동대스러운 기술이었고, 그 가능성이 기대를 모아 결국 앞서 언급한 구글글라스라는 괴이한 물품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다가 이내 구박을 받았다. 그것은 아마 우리는 일상에서 이미 너무 많은 정보량을 감내하고 있으며, 스카우터를 통해 보이는 초샤이어인의 전투력 따위는 소개팅이나 사회생활에 전혀 써먹을 데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전부터는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채 현실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려는 기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뭔가 기술입국의 미래가 걸리고 따라가지 않으면 나라가 패망할 것만 같은 이 가상현실 (VR:Virtual Reality)이라 부르는 기술은 그러나 일단 현실의 경험과 그닥 유사하지 않고, 한번 슬쩍 쳐다볼까말까 한 장면을 위해 쓸모없는 데이터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만들어내며, 결정적으로 이용자가 그 잠수물안경같은 디스플레이를 쓰고 허우적대는 게 너무 부끄럽다는 전지구적 저항에 직면해, 아직은 지지부진한 중인가보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은 뭔가 IT스럽고 뭔가 스마트폰 스럽다는 점에서 친구인 것만 같지만, 사실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하나는 가상을 현실에 통합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과 완벽하게 분리된 유사현실을 가공해낸 것이다. 구글글라스나 VR 물안경이나 똑같이 부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지만, 구글글라스는 그걸 쓰고 사회생활 하기에 현실에서 창피한 것이고, VR 물안경은 타인도 그것을 착용한 걸 보고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던가’하고 깨닫게 되는 존재론적 창피함일 것이다.
“에? 뭐라고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은 연극에서는 꽤나 오래 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5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의 어느 극장에서 무대 위 배우가 “여기는 역병이 감도는 테바이” 라는 대사를 읊을 때, 역병이 감도는 테바이는 커녕, 플라타너스 빽빽한 아테네 시가와 저멀리 물비늘 반짝이는 평화로운 에게바다가 관객 눈에는 뻔히 보였을 것이다. 당시엔 야외극장밖에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관객이 ‘에? 여기 테바이 아닌데? 우리 동네에 역병 없는데?’ 생각했을 리 없다. 관객은 자신의 현실 위에 ‘역병이 감도는 테바이’라는 또하나의 현실을 겹쳐서 보았을 것이다. 그 겹쳐진 현실감으로 인해 관객은 연민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고, 카타르시스를 얻었을 것이다. 무엇을 무대에서 보던지 현실의 확장이었을 것이고, 연극은 결국 우리 삶과 운명에 대한 성찰로 수렴되었을 것이다. 당대의 모든 연극은 현상적으로 현실을 담을 수밖에 없다. 관객은 연극을 통해, 예술을 통해 현실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던 정보와 만져지지 않던 현실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로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연극이 더욱 복잡하고 정교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생겨났을 것이고, 이를 위해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 현실에 집중하고 몰입하도록 이런저런 방법을 고안해냈을 것이다. 결국은 사면이 현실과는 차단된 실내극장이 생겨났고, 현실과 완벽하게 분리된 이 공간에서 연극은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영리해진 우리는 실내극장의 객석에 있으면서도 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앉아있는 곳이 결국 어딘가. 극장이다. 우리의 현실은 극장 안에서 결국 ’정보’로만 다뤄진다. 아무리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극장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극장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극장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채 현실과 유사한 경험을 정교하게 제공하는 곳일 뿐이다. 극장에서의 경험이 리얼하면 리얼해질 수록, 현실에서의 경험과의 간극은 더 커질 뿐이다. 극장 안에서 어떤 몬스터를 찾아내고 잡더라도, 한 걸음 밖에서 쳐다보면 골방 안에 앉아 VR 물안경을 쓰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학여행 가는 배가 가라앉는다. 사람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동네에 난데없이 어마어마한 미사일부대가 생긴다. 여름 휴양지의 트럭이 살상무기로 돌변한다.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군부쿠데타와 피의 숙청이 이어진다. 초현실적 지옥은 조선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구글맵이 커버하는 모든 지역에 펼쳐지고 있다. 몬스터는 극장 안이 아닌, 거리에, 들판에 있다. 이제는 우리 현실 안의 몬스터를 직접 찾아내러 방문을 열고, 극장문을 열고 뛰어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 이런 초현실적인 현실에서 살아내기 정말 피곤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의외로, 인제 신남일지도.
현실의 몬스터가 이렇게 귀여울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