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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열대야

박해성_연출가
98호 2016.08.18
정식으로 사과드린다. 한달 전의 더위 따위를 두고 불볓 더위라고, 여름 휴가철이 왔다고 설레발 친 점. 방 문을, 극장 문을 열고 뛰어나가기만 하면 신날 지도 모른다고 무책임한 언사를 남발한 점. 두 번 사과드린다. 더위도 이런 지옥 더위가 없다. 하늘 아래 공평한 천재지변이라고 하기엔 뭔가 더위에도 직종과 계급이 나뉜 것만 같아 묘하게 억울...

정식으로 사과드린다. 한달 전의 더위 따위를 두고 불볓 더위라고, 여름 휴가철이 왔다고 설레발 친 점. 방 문을, 극장 문을 열고 뛰어나가기만 하면 신날 지도 모른다고 무책임한 언사를 남발한 점. 두 번 사과드린다. 더위도 이런 지옥 더위가 없다. 하늘 아래 공평한 천재지변이라고 하기엔 뭔가 더위에도 직종과 계급이 나뉜 것만 같아 묘하게 억울하고 무기력하다. 직업 특성상, 정년이 없으나 월급도 없고 출근이 없으나 퇴근도 없기에 휴가철에 휴가를 가본 일이 없다. 시기만 맞으면 한결 한적한 시기에 한적한 가격으로 얼마든지 쉴 수 있(또는 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만큼은 왜 굳이 성수기에 휴가를 가야 하는 지 온 몸으로 깨닫는 중이다. 여름 휴가는 아무 때고 갈 수 있는 휴가를 굳이 성수기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더워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쉬면서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핏기 1도 없는 웰던”으로 유명한 짤(출처: twitter.com/JTBC_news)

예술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느 초여름 날, 국지성 호우를 뚫고 수업을 빙자한 술자리를 향해 노곤하게 함께 걷다가 지금은 돌아가신 어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문학은 기후를 따라가. 이제 아열대 기후가 돼가니 한국의 문학도 아열대 문학이 되겠구나” 당시 머릿 속에는 술자리 생각 밖에 없었기에, 아열대 문학하고 열대 문학은 도대체 어떻게 구분될까 잠깐 생각하다 말았을 것이다. 몇년 후 또 다른 어느 노선생은, 내가 연출한 덴마크 어느 도시 이름이 제목이었던 공연을 보신 후 느닷없이 물으셨다. “북유럽에 가봤니?”, “아뇨”, “뭐가 빠졌나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아니 이게 무슨, 그럼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 하나 만들려면 안드로메다 정도는 가봐야 한단 말씀인가요(방백)’, 이어 선생은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과 헬싱괴르(엘시노어)의 <햄릿>, 그리고 밤 안개 속 코펜하겐 거리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북유럽을 영화로만 가본 나는 그냥 ‘아, 공연이 더 우중충해야 한다는 말씀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후에 이런 저런 지방을, 도시를, 혹은 나라를 잠깐씩 방문할 기회가 드문드문 생기면서 ‘아 이런 동네에서 그런 작품들이 나온 것이었구나’ 공부하듯 생각해봤지만, 막상 그런 곳에서 오래 생활해본 적이 없기에 단순히 책으로 접한 역사, 지리적 배경이나 어디서 주워들은 문화적 맥락만 얼기설기 연결해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댈 뿐이었다. 역시, 구라파 미주 아세아 아프리카 호주 오륜기 색깔별로 평화롭게 10년씩, 도합 50년은 생활해봐야 ‘아 예술이란 이런 거구나’ 제대로 음미하고 창작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럴 리가. 40년 내리 살아온 한국의 공연과 예술의 특징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근현대만 따지고 보면 한국 예술이 유럽이나 미국향인것 처럼만 보인다. 오죽했으면 어느 자리에서 모 동료연출가의 “연출들은 지들이 다 유러피안인 줄 알아”라는 자해개그에 모두가 단체뜨끔했을까. 도대체 어느 문화권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려면 뭘 알아야 할까. 이 순간, 한국의 문화와 예술은 무엇을 공유할까.

더위도 이런 지옥 더위가 없다. TV에선 온갖 종목별 스포츠 스타들이 피겨 스케이트를 타고 수영을 리듬체조를 온갖 시원한 짓을 다 해가면서 우주선도 띄울법한 최첨단 기술로 매해 새로 무장하는 에어컨을 사라고 부추겨놓더니, 산업용 전기요금 감면을 깨알같이 받으며 생산된 그 에어컨을 집집마다 고이 모셔놓은 시민들은 막상 전력량계 보며 초 세어가면서 틀거나, 누진전기요금보다 더 많은 돈을 써가면서 냉방 오아시스를 찾아 방황한다. 냉방을 이용하지 않으면 단순히 더위만 겪는 게 아니라 이웃 냉방기의 열기까지 감내해야 한다. 냉방은 이제 생존경쟁이 됐다. 여기에 전력과잉소비나 핵발전소 이슈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이전에 전기요금 관련 이슈라고는 공영방송 수신요금 기본포함문제나 기껏해야 블랙아웃을 볼모로 한 절전 켐페인이었다면, 지옥더위를 맞은 올해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시방 민란 직전이다. 이 더위는 단순히 기록상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전기요금 몇 만원에 정의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시민들이 공기처럼 공유하는 억울함과 분노의 경험의 영역이다.

그걸 몰라서 민란 일어날 뻔(출처: twitter.com/kyunghyang)

기억에 남을 만 한 더운 여름이고, 대형 마트와 백화점은 피서객들로 넘친다. 영화관은 명실상부한 성수기를 맞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림픽 이슈는 예전보다 시들한가보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비수기를 맞은 공연장들의 분투가 있다. 몇 몇 소규모 공연장에서는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하는 릴레이 연작들이 올라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더위를 뚫고 온 관객들이 계속 이어진다. 이 관객들을, 이 창작자들을 더위 속 극장으로 모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순간, 한국의 문화와 예술과 거리를 걷는 시민들의 얼굴과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와 TV와 소셜미디어에 반응하는 댓글들은 무엇을 공유할까.

혜화동1번지 6기동인 기획초청공연 “세월호 이후의 연극, 그리고 극장” (출처: 혜화동1번지 6기동인)

매해 더운 여름을 겪으면서도 이내 잊어버리고 우린 매해 겨울마다 여름을 그리워했다. 기록으로, 기억으로 남은 더위는 흐릿해졌고, 왜곡됐고, 그 해의 짜증과 그 해의 블랙아웃과 전기요금은 이내 잊혀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모두가 공유하는 그 ‘공기’가 있다. 우리에게 “기후”라는 것은 너무나 익숙해서 그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주 긴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혹은 어느 짧은 순간 폭발적으로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경험했던, 모두가 들이마셨던 공기일 것이다. 책으로 기록으로 수치로는 온전히 기록되지 않을, 그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경험이 있을 것이고, 그 경험들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더위는 잊혀지겠지만, 더위를 둘러싼 피할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의 경험은 우리의 삶에, 예술에, 문학에, 연극에 어떻게든 그 흔적을 남길 것이다.
2년 전 그 사고는 잊혀지고 교실에서 희생자들의 흔적은 지워지겠지만, 그 사고를 둘러싼, 마치 공기와 같이 우리 모두가 들이마시고 폐에 머금었던 그 공포와 분노의 경험은 그 이전의 삶, 예술, 문학, 연극과 이후의 그것들을 다르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 시대, 그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그 ‘공기’만이 어쩌면 그 곳의 예술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