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권위적이지 않은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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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의 수상자 선정 관련 뉴스에 대한 반응이 올해는 색다르다. 무엇보다 노벨문학상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의 반짝특수를 기대하던 출판사들이 허망할 것이고, 검색엔진에서 수상자의 작품을 검색하는 손이 바빠질 것이며, 한글가사를 펼쳐놓고 간만에 포크 록 음악을 들으며 아 이게 이런 내용이었구나 할 것이다. 최근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 정부와 전경련이 관여한 “문화전문재단”에 적잖이 실망하고 황당한 입장에서는 거의 시샘에 가까운 부러움도 생길 것이다. 가만있자 이게 음악상이야 문학상이야 할 것이며, 아 예술의 경계라는 게 이렇게 확장이 가능하구나 할 것이다. 아, 역시 노벨문학상은 사이즈가 다르구나. 역시 뭐든 구라파산이 최고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출처: theguardian.com)
‘권위’라는 단어는 참으로 간지난다. 권위는 대중의 절대적인 신뢰와 막강한 영향력, 신속한 파급력을 가진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 만 해도 간지지만,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하면 간지 폭발이다. 노벨문학상은 전 세계 출판 베스트셀러를 넘어서 음반시장 판도를 뒤흔들기도 하고, 어떤 철학자나 경제학자, 과학자는 국가나 수 많은 대중을 교육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기도, 세계경제나 산업구조의 방향을 뒤바꾸기도 한다. 권위는 특성상 소수에 집중되며, 그 자체가 실질적인 힘이다. 권력은 역학관계의 산물이지만 권위는 절대적인 현상이라는데서 권위는 권력마저 넘어선다. 그렇기에 권력은 권위를 등에 업으려고 노력한다. 이 정도면 권위는 모든 이들이 갖고 싶어 할 만 한 절대반지라 할 만 하다.
권위의 힘을 원하지만 그것을 갖지 못한 경우를 일컬어 우리는 ‘권위주의’라고 한다. 이 경우 파급효과나 간지를 얻기 위해 큰 상금을 건 상을 만든다던지, 막강한 영향력과 신속한 파급력을 갖기 위해 대상을 세뇌하거나 윽박지른다. 하지만 자본이나 물리력에 의존한 권위는 딱 그 자본과 물리력만큼의 권위만을 가질 뿐, 확장되거나 지속되지 않는다. 심지어 자본도 물리력도 없이 권위를 표방하는 경우, 우린 그냥 꼴통이라며 무시한다. 권위주의에는 다른 뜻도 있다. 권위가 있어 보이는 것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우이다. 사실 권위가 가지는 파급효과는 이러한 권위주의도 한몫 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역시 단기간 확장은 가능하지만 지속은 요원하다. 우리가 검색창을 열고 어느 동네 맛집을 검색할 때가 바로 권위에 기대는 순간이지만, 몇 번 뒤통수를 맞고 보면 더 복잡한 검색알고리즘을 통하거나 직접 발로 뛰면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사실 ‘권위’라는 것은 결과론적인 개념이다. 여기 있소 하고 난데 없이 옆구리에 끼고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생겨나는’ 것이 바로 권위이다. 군인에게 아무리 정신훈련을 하고 얼차려를 주며 제식훈련을 시켜도 군의 권위는 생겨나지 않는다. 군의 조직과 행태가 자부심을 느낄만 할 때에야 군의 권위가 생겨난다. 충성을 강요하려 백날 정신훈련 하고 얼차려 줘봤자 멍때리며 시간보내기 능력이나 악다구니만 늘 뿐이다. 이는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애국심이라는 말 자체가 ‘넌 날 사랑해야 돼’ 혹은 ‘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국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강요하거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권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위’라는 단어는 ‘인정’이라는 필요조건 위에 존재하며, 자본과 물리력을 넘어서는 영역의 확장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국가의 권위는 아주 오랜 검증과 신뢰의 단계를 거쳐서 완성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 관련 [한국일보] 기사
(출처: http://www.hankookilbo.com/v/0abb634242a64afca79799b09f8564f4)
창작자에 주어지는 상의 권위는 수상자의 권위를 통해 검증된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창작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천년 만년 해온 얘기를 천년 만년 해온 방법으로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무언가 다르고 새로운 구석이 있지 않는 한 그 창작은 권위를 갖지 못한다. 새로운 것은 그야말로 변경을 넓히는 일이다. 기존의 경계 내부의 입장에서는 위험하고 불온한 일일 수도 있고, 불쾌하거나 아예 이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창작자는 구태에 머물 수 없는 운명이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창작자의 존재 이유이자 권위의 근거이다. 자존감을 가진 창작자에게 창작의 한계와 경계를 누군가가 지정하고 강제한다면, 혹은 원인이 무엇이건 엄청난 용기와 희생이 있어야만 어떤 경계를 넘을 수 있는 환경에 창작자가 놓이게 한다면 그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창작자의 존재이유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의 권위에 대한 문제이다.
대통령이나 정부기관이 “창작의 자유를 말살”할 이유로 어두운 골방에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집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일단 잡무가 너무 많고, 그런 중요한 업무의 결과물이라기엔 리스트의 당위성이나 정교함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애국심”을 발휘하여 “우리 정부가 그 정도로 무능하진 않다”고 믿는다면, 문제의 핵심은 정책집행의 과정에서 창작자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문제로 모아진다. 문화예술기관이 창작자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기관의 목적과 준거가 흔들리고 기관 자체의 권위가 위태로와지고 있는 것이다. 기관이 지금의 권위를 가지게 된 건 문화와 예술이 정부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자임하던 치욕의 시대를 극복하고 아주 오랜 검증과 신뢰의 단계를 거친 결과이다. 지금처럼 한번에 무너진다면, 다시 그 권위가 생기는 데에 또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할 지 모른다. 진정한 권위는 권위를 깎아먹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 밥딜런 할아버지는 노벨상위원회의 전화를 씹고 있다고 한다. 경계를 넘어낸 예술가의 권위는 이런 것이고, 이런 권위를 존중하는 것 역시 노벨문학상의 권위이다.
영화 <아임 낫 데어> 포스터(출처: popculturephilosoph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