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질문하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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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무한과 영원의 심연 속에서 실낱같은 생존의 길을 찾는 인류의 스훽타클하고도 아스트랄한 여정을 그리는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왔던 이 선언적 대사는, 정답을 알려달라고 아버지라도 붙잡고 랩 하고 싶은 이런 노답 현실 ...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무한과 영원의 심연 속에서 실낱같은 생존의 길을 찾는 인류의 스훽타클하고도 아스트랄한 여정을 그리는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왔던 이 선언적 대사는, 정답을 알려달라고 아버지라도 붙잡고 랩 하고 싶은 이런 노답 현실 속 우리에게 뭔가 꿈과 희망과 용기와 의지와 기타 등등을 북돋는다. 그런데 찾아보면 이 대사의 원문은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이다. 뭔가 오역은 아닌데, 뭔가 듣고 싶은 대로 들은 느낌이다.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는 길(답) 중 하나를 찾는 것과 유일한 길(정답)을 찾는 것은 분명 다른 접근과 태도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답’은 늘 ‘정답’이고, 우리가 애타게 찾고 싶은 건 바로 그 정답이다.
MBC <무한도전>중 캡처(출처: imbc.com)
우리는 정치의 세계를 뭔가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 간지로 예상했는데, 막상 뚜껑 열리고 보니 애니매이션 <사우스파크>만도 못한 나라였다. 한창 JTBC에서 특종을 터뜨리기 시작하던 시기에 공연 중이었는데, 같은 시각에 시작하는 뉴스룸 보느라 공연장에 관객이 안들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공연 때문에 뉴스룸을 못 보는 게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현실이 사우스파크보다 코믹하고 하우스오브카드보다 절망적인데 공연이, 예술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는가 하는 흔한 걱정은 할 겨를도 없이, 오늘도 틈만 나면 뉴스를 보고, 속보를 뒤지며, 촛불집회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친구들이 올린 인증 샷과 언론사에서 올린 촛불장관을 순례하며 ‘좋아요’와 ‘공유’버튼을 누른다. 술자리에서는 ‘어떻게 될 것 같아?’하고 서로 묻고, 열을 내며 뉴스에서 본, 소셜미디어에서 본, 칼럼에서 본 풍월을 내 생각인 것처럼 읊는다. 비아냥대고 울컥하다가도 문득 나라가 망해버릴 것 같아 소오름이 돋는다.
그런데 또 신기하게도 일상은 거짓말처럼 변함없다. 여전히 공무원 합격은 에듀X이며, 최저시급 주는 알바 찾아서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 나도 외국어학원 다녀서 재벌기업에 취직할 것이며, 내 아이한테 말 한필 사줄 돈까진 없지만 수능시험 잘 봐서 좋은 대학 가서 정규직 되게 할 것이다. 여전히 노조는 뭔가 운동권이고, 비정규직은 그냥 흙수저이며,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은 내 해외여행 예산에 어떤 환율영향을 끼칠 지 궁금하다. 분명히 국정농단이네 헌정 중단이네 하는데, 열 받고 짜치긴 하지만 사실 나하고 직접 관련은 없다. 오늘의 일상은 내 몫이고, 난 어떻게든 살아남아 내 자식은 다른 집 자식보다 빛나는 수저를 물리고 싶다. 아무리 헬조선이라지만, 너무 급격하게 변화하면 지금껏 쌓아온 게 한 번에 무너질까 살짝 겁도 난다. 바뀌긴 바뀌되, 뭔가 점층적으로, 뭔가 조금씩만 바뀌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이 나라는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뭐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다.
영화 Interstellar(2014)중 한 장면(출처: IMDB.com)
‘이 시대에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사실 창작자에게 무겁고 쓰라린 질문이다. 창작자는 역시 시민의 한 명으로서 이 시대의 고통을 나눠 지고 있을 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대면할 수 밖에 없는 감수성을 지니기도 한다. 창작자는 각자의 방법을 통해 시대에 반응한다. 어떤 예술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든다. 때로는 (하얀 거짓말일지도 모를) 희망과 환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을 유쾌하게 비틀어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통쾌한 복수를 경험하게 만든다. 깊은 공감으로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 고통의 순간에서 잠시 벗어나 다시 고통의 순간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게 한다.
어떤 예술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답’을 제시한다. 시민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을 제안한다. 예술은 그것이 정답임을 설득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이 경우 훌륭한 예술은 설득력 있게 답을 제시하는 예술이 되며, 그것을 정답이라고 받아들인 시민들을 움직이게 하는 파급력은 커지게 된다. 아마 많은 권력이 이러한 파급력을 두려워하여 ‘검열’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렀을 것이다. 문제는, 훌륭한 예술은 훌륭한 설득력이 있다는 점일 뿐이지, 그 답이 유일한 정답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전체주의 프로파간다에서 보듯, 오히려 유일한 정답임을 주장하는 예술은 나머지 ‘오답’들을 검열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길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다.
어떤 예술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질문만을 던진다. 이 질문은 사실 고통스럽다.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시절인데 답을 주기는커녕 답을 직접 찾기까지 하라고 한다. 하지만 길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길이 어떤 훌륭한 예술가나 셀럽 칼럼니스트나 비중 있는 정치인이 제시하는 ‘정답’이 아니라 관객 각자가, 시민 각자가 직접 찾아내는 길이라면, 우리의 여행은 좀 더 낙관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