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권한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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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도록 시민들은 광장을 채웠고, 하나의 길을 찾았다. 중요한 물꼬를 오로지 광장의 힘만으로 트게 되면서 시민들은 자존감을 얻었다. 권력자와 권력에 부역했던 자들을 향해 통쾌한 비웃음과 비아냥의 배틀이 우리의 광장을, 인터넷을 수놓고 있다. 그간 너무 엄혹한 시절을 겪었던 탓인지, 그것마저도 하나의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럴 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축제인데. 시대착오적 봉건권력자들의 행동에 대한 비아냥은 종종 ‘여혐’의 관점과 언어로 표출되기도 한다. 다행히도 위험한 순간마다 정당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곤 하지만, 그 문제제기가 당사자들에게 제대로 접수 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처럼 만인의 공적이 더 중요하다는 추세라면, 다 같이 놀자고 하는 말인데 사소한 표현 하나로 ‘정의’라는 이름의 축제에 찬물 끼얹느냐는 반응도 만만찮은 듯하다. 어쩌랴, 축제인데. 하지만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모든 축제는 반드시 소멸한다는 점이다.
DJDOC의 <수취인분명> 뮤직비디오 캡처(출처: go발뉴스 youtube)
세상의 모든 축제는 일시적이다. 일년 내내 이어지는 축제는 이미 축제도 아닐 뿐더러, 재미도 없다. 일상에서 억눌려온 감정이나 욕망들이 어떤 한시적 계기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발산되는 것이 축제이다. 따라서 축제의 발산정도는 그 사회가 그간 얼마나 억눌렸나를 반영하기도 한다. 동서고금으로 영민한 지배자들은 그 일시적인 축제를 통해 피지배자들이 불만이나 욕구를 모두 발산하고 다시 엄혹의 세계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고등학교 시절 유독 축제 때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자유를 누렸던 것도, 권력자에 대한 풍자를 놓지 않았던 조선시대 사당패들에게 정작 권력자가 후원을 했던 것도, 축제 다 끝나면 제 자리로 돌아가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영민하지도 않은 권력자는 모든 분출구를 다 틀어막고 검열만 일삼다가 결국엔 폭발하는 혁명을 맞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광장으로 되찾은 이 축제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대통령의 사임일까, 헌재의 탄핵인용 결정일까. 소원대로, 우리의 울분과 슬픔을 그대로 되갚아 그 인물의 가장 모욕적인 순간을 우리가 생중계로 목격하게 되면 다들 그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좀 더 즐기다 주섬주섬 집으로 돌아올 것인가. 그 인물이 특별한 여성이라거나 특별하게도 머리손질을 했다거나 등등 시민들 조롱의 대상이 되는 그 대부분의 특별한 시리즈말고, 정확하게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그 인물이 그토록 특별한 사람이었고 시민들은 운이 안좋았을 뿐일까. 그 사람만 아니면 뭐든 나아질까. 그렇다면 왜 시민들은 과거 그 많은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얻고도 왜 다시 그 특별한 독재자를 대통령으로 뽑았던가.
사실 따지고 보면 단순한 일이다. 책임이 있으면 책임만큼의 권한도 가진다는 것. 권한이 있다면 그 권한 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단지 그 엄중한 원리인 것이다. 그 인물(들)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 했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정작 희생과 책임은 아무런 권한도 가지지 못한 이들의 몫이었다. 결국엔 광장을 통해 권력자에게 강제로 책임을 지우는 절차가 겨우 시작되었지만, 이는 다분히 정상적인 상황이다. 이게 그토록 특별한 일일까, 권한만큼 책임지지 않는 인물들이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존재일까.
양경수 작가 “약치기 그림”(출처: http://instagram.com/yangchikii)
권한은 주어지지 않은 채 책임만 지워진 삶에서 우린 소진돼왔고, 누구로든지 대체가능한 존재가 됨으로써 우리의 자존감은 바닥을 쳐왔다. 아무리 작은 일을 수행하더라도 그 책임에 해당하는만큼 나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 일은 나에게 특별한 일이 될 것이고, 결국 우리 자리에서도 충분히 자존감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은 채 권한만 가진 이들로 인해서 우리의 욕망과 양심은 뒤틀리게 되었고, 결국 우리도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게 내밀한 소망이 될 정도이다. 권한과 책임은 동가여야 한다는 이 원리가 모든 단위에 동등하게 주어진다면, 큰 권한을 행사하는데 더 책임있는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의 아무리 작은 집단, 아무리 큰 집단을 살펴보더라도 힘없고 권한 없는 이들의 희생과 책임이 더 크다.
기업의 경영에 책임을 지는 소유주는 없고 그 책임은 우선해고되는 노동자들이 짊어진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지하철노동자에게 안전운행을 보장할 환경과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다. 건물주는 세입자에게 소유권한만 행사하지 주거권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그렇게 우리의 장래희망은 건물주가 된다). 비정규직과 시간제노동자는 바로 그 이름의 이유만으로 아무런 안정적 권한이 없다. 군에서 사고나 부정이 발생해도 책임 지는 장교는 없다. 결국 어느 특별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서 이 모든 사단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권한과 책임은 동가여야 한다는 대전제가 이 사회 어디에서건 합의된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 인물의 특별함에 대해서 비아냥대고 조롱하는 것은 이제 막 시민으로서의 자존감을 얻기 시작한 우리가 누릴 축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축제는 언젠가 끝날 것이고, 우리의 비판이 정확한 지점을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존감도 축제와 함께 다시 사라질 것이다.
2016년 12월 10일, 청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