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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열의 리플레이]

블랙리스트 vs 화이트리스트

고재열_시사IN 문화팀장
107호 2017.01.05
요즘 TV 오락프로그램 중에서 ‘흙길'과 ‘꽃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연예인들이 특정 지역을 여행하는데, 게임에 지거나 운이 없는 사람은 고생길인 ‘흙길'을 걷고 게임에 이기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화려한 ‘꽃길'을 걷는 프로그램이다. 같은 지역을 여행하면서도 경제력과 운에 따라 어떻게 극과 극의 체험을 할 수 있는지를 ...

요즘 TV 오락프로그램 중에서 ‘흙길'과 ‘꽃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연예인들이 특정 지역을 여행하는데, 게임에 지거나 운이 없는 사람은 고생길인 ‘흙길'을 걷고 게임에 이기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화려한 ‘꽃길'을 걷는 프로그램이다. 같은 지역을 여행하면서도 경제력과 운에 따라 어떻게 극과 극의 체험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근혜정부 하에서 문화예술인들도 ‘흙길'과 ‘꽃길'을 따로 걸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른 1만여 명은 ‘흙길’을 걸었고 최순실과 가깝거나 유신독재를 찬양한 문화예술인은 특권과 특혜가 흩뿌려진 '꽃길'을 걸었다. 이들의 이름이 오른 ‘화이트리스트’를 ‘블랙리스트’와 비교해 보아야 박근혜정부의 문화농단이 선명하게 보인다.

긴급체포된 류철균(이인화) 이화여대 교수와 같은 사람은 화이트리스트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내용의 소설 『인간의 길』을 썼던 류 교수는 2014년 3월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최근 박영수특검은 류 교수가 최순실씨의 추천으로 위원이 되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류 교수는 최씨의 딸 정유라씨가 수강한 강좌의 담당교수로 정씨의 답안을 조교에게 대신 작성하게 하고 학점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시험 당일 정씨는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류철균 교수나 차은택(전 창조경제추진단장) 송성각(전 콘텐츠진흥원장) 등 소수의 사람들이 ‘꽃길’을 걷는 동안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1만여 명의 문화예술인은 진창이 된 ‘흙길’을 걸었다. 대표적인 이가 연극연출가 박근형씨다.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풍자한 연극 <개구리>를 연출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대한 예술 지원금을 신청했다가 부당하게 취소당했다. 국악원에서 <소월산천>을 공연했을 때는 단지 박근형이 연출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연이 무산되기도 했다.

박근형 연출가처럼 이렇게 한 번 찍히면 다른 곳에서는 아예 고려 대상으로도 넣지 않기 때문에 기회를 원천 박탈당하게 된다. 다행히 박근혜정부의 자장 밖에 있는 공간, 서울시가 관리하는 공간인 남산예술센터에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공연하고 플랫폼창동61에서 <소월산천>을 공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의 검열은 그의 창작혼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후배 연극인들이 기획한 검열연극제(‘권리장전2016_검열각하’)에서 김재엽 연출가가 그의 검열 사례를 조명한 <검열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을 발표하기도 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박근혜정부의 검열 방식은 군부독재 시절의 검열 방식보다 악독했다. 몇 가지 짚어야 할 포인트가 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검열의 주체가 사법·사정기관이었다. 법과 권력으로 문화예술인들을 눌렀다. 그런데 박근혜정부의 검열관은 문화행정가들이었다. 이들은 돈으로 눌렀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지원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예술가를 길들였다. 예술가들이 자기검열을 하도록 만들었다. 사법·사정기관의 검열은 사후적인데 반해 문화행정가의 검열은 사전적이다.

문화예술인들이 검열에 신음할 때,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검열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대부분 영전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으로 임명한 송수근 전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이 대표적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수사하기 위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체부 장관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한 특검은 정관주 전 문체부 차관, 김상률·모철민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신동철 전 정무비서관, 용호성 주영국 한국문화원장,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김낙중 LA 한국문화원장, 김소영 전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을 줄줄이 소환해 조사했다.

이제 검열을 검열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해 일본제국주의 지배 하의 시절처럼 문화예술계를 검열했던 문화행정가 부역자들을 철저히 조사해서 처벌해야 한다. 여기에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후대에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