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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선의의 시대

박해성_연출가
116호 2017.05.25
오늘도 애플에선 새로운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4차산업시대를 맞아 지갑을 내놓으라 하고, 삼성에선 벽만한 TV가 나와 벽을 자기한테 걸어달라고 한다. 에어컨은 황송하게도 내 기대수명까지 챙겨준다며 나서고, 세탁기는 짬뽕국물 튀긴 내 셔츠의 분자구조까지 연구해준단다. 무릇 요즘 전자제품은 그 하나하나가 우주선만큼 첨단첨단하고, 때맞춰 골목을...

오늘도 애플에선 새로운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4차산업시대를 맞아 지갑을 내놓으라 하고, 삼성에선 벽만한 TV가 나와 벽을 자기한테 걸어달라고 한다. 에어컨은 황송하게도 내 기대수명까지 챙겨준다며 나서고, 세탁기는 짬뽕국물 튀긴 내 셔츠의 분자구조까지 연구해준단다. 무릇 요즘 전자제품은 그 하나하나가 우주선만큼 첨단첨단하고, 때맞춰 골목을 지나는 트럭에서는 우리 집의 3차산업시대적 유물들은 얼른 내던져버리라고 확성기로 읊조린다. 세상에 저렇게 새로운 물건이 많이 나오고 팔린다는 건 그 만큼 버려진다는 얘긴데, 그 많은 물건들은 대체 어디 쌓여있을까. 이거 뭔가 지구한테 몹쓸 짓 하는 건 아닐까. 더 쓸만한 걸 사기 위해서 버리기는 해야겠고 아직 쓸만은 한 걸 버리려니 죄책감은 들고. 아, 그렇다면 “어려운”이웃에게 기부하는 건 어떨까. 무릇 기부야말로 여유로운 개념시민의 아이콘 아니던가. 그렇게 우리는 휴머니즘에 입각해서 물건들을 어려운 이웃에게 버린다.

아무렴요.(출처: 네트의 바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개념시민들의 “선의”는 어디로 향했을까. 정말로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이 됐을까. 적어도 적절한 과정을 거쳐 재활용되어 환경에는 도움이 됐을까. 기부되는 물품 중 극히 일부분은 재가공을 거쳐 사용되기도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재활용 이윤으로 수거업체 혹은 기부처에 분배된다. 그런데 재활용산업이라는 것이, 환경기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재활용 비용이 높게 발생해 재활용 이윤을 남기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재활용 이윤을 남기기 수월한 곳, 즉 환경기준이 낮은 국가로 전 세계의 전자쓰레기가 모인다. 그렇다면 환경기준이 낮은 국가는 어떻게 재활용 이윤을 발생시킬까. 해당국가의 어린이와 극빈층이 매일 전자쓰레기를 떼다가 회로기판을 불에 직접 녹여 금속을 추출해서 판다. 극미량의 금, 철, 구리, 은, 알미늄, 팔라듐을 얻기 위해서 이들은 매일 엄청난 양의 전자부품을 소각한다. 그렇게 각종 유해물질 뿐 아니라 수은, 카드뮴 같은, 장기 훼손과 심각한 정신적 손상을 일으키는 중금속에 서아프리카와 중국 광동성의 수많은 “이웃”들이 노출됐다.

그 뿐인가, 한 때 하도 흔해서 입다 입다 못해 걸레로 쓰고도 지천에 널렸던 “Be the Reds”티셔츠를 포함한 “버려진” 의류를 극빈국에 기부해 국위선양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결과 해당국가에서 막 싹트던 섬유산업이 붕괴됐고, 수많은 섬유노동자가 다시 거리로 나앉았다. 우물, 학교, 책, 백신 등 아프리카를 포함한 제3세계를 향한 전 세계의 기부의 양은 어마어마한데, 정작 그래서 뭐가 좀 나아졌다는 소식은 못 들어본 것 같다. 우리의 “선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 그 선의는 결국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거리에는 수많은 봉사단체들이 후원자를 모으고 TV엔 기부를 제안하는 광고들이 나오지만, 불쌍한 이웃들의 자극적인 사진만 보여주지 어떤 절차와 방법으로 어떤 도움이 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셜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어린이의 자극적인 사진을 걸어놓고 “좋아요”를 누르면 얼마씩 기부하게 된다는 류의 포스트에도, 내가 누른 그 “좋아요” 버튼이 정확하게 어떤 과정으로 기부와 연결되는지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정작 선의를 “베푸는” 우리는 선의 이후의 결과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출처: smithsonianmag.com ©Jon Spaull/SciDev.Net)

우리는 자신을 위해 새로운 전자제품을 살 때, 옷 한 벌 살 때, 밥 한 끼를 먹어도 그 효용과 가치, 감가상각, 구매후기, A/S까지 토 나오도록 꼼꼼하게 따져본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착한 일, 즉 선의를 베풀 때는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엄밀히 따져보지 않고 기분 가는대로 행한다. 선의와 의심은 어쩐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선의의 결과보다는 선의를 행하고 있는 나 자신에 집중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엄밀하게는 선의에도 결과가 필요하다. 그게 진정한 선의라면. 그게 진정 이타적인 마음이라면, 오히려 자신을 위한 행위보다 더 결과 중심적이어야 하고 과정은 더욱 효율적이어야만 한다. 선의 특유의 열정과 뜨거움에 사로잡히는 걸 오히려 경계하고, 선의일수록 냉철하고 차갑게 수행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게 번거롭고 귀찮다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이타적인 선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선의”를 “정의”로 바꾸어 봐도 모두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