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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석연찮은 세계

박해성_연출가
118호 2017.06.22
원작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세익스피어 희극을 객석에서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석연찮은 점이 없지 않다. 종종 체홉 연극의 어떤 면도 그렇다. 그런 석연찮음의 끝판왕은 아마 몰리에르 희극이 아닌가 싶다. 그리스 희극도 만만찮다. 왠지 모를 그 석연찮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단 유명한 희극이라는데 전혀 웃기지 않다. 뭔가 내가 아는 웃음 말고 뭔가 고전이고 뭔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세익스피어 희극을 객석에서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석연찮은 점이 없지 않다. 종종 체홉 연극의 어떤 면도 그렇다. 그런 석연찮음의 끝판왕은 아마 몰리에르 희극이 아닌가 싶다. 그리스 희극도 만만찮다. 왠지 모를 그 석연찮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단 유명한 희극이라는데 전혀 웃기지 않다. 뭔가 내가 아는 웃음 말고 뭔가 고전이고 뭔가 그리스적이며 뭔가 명작이며 르네상스적이고 구라파적이고 영미권스러운 “고상한 웃음”이란 게 따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여기에 대고 안 웃기다 하면 뭔가 세익스피어나 체홉이나 몰리에르나 아리스토파네스를 이해 못하는, 고상한 극장에 걸맞는 우아한 관객이 못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기립을 하고 박수는 친다만, 이 박수가 공연에 대한 박수인지 우아한 관객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나에 대한 박수인지 못내 석연찮다.

출처: newyorktheater.me

사실 따지고 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순수한 “빵 터짐” 타이밍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 경우는 아마 대부분 온전히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 희극적 템포 운영에 기인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응하는 대상이 배우의 희극적 개인기라는 말인데, 그럼 그 위대한 희곡의 희극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작품이 희극으로 만들어진 이유가 단순히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것 이상이라면, 그 웃음을 통해 뭔가를 풍자하고 공격하기 위함이라면 그 풍자와 논평의 대상이 되는 시대의 문화, 사회적인 맥락이 정교하게 녹아있어야 할 것이고, 관객이 그것을 공기처럼 쉽게 호흡할 수 있어야 비로소 웃음이라는 현상으로 희극이 완성될 것이다. 어쩌면 그 희극성라는 것이 이렇듯 현재적 맥락의 현상이라 그것을 섬세한 텍스트로 옮기는 것은, 게다가 그것이 여러 언어권과 문화권, 하물며 수백 년의 시대를 관통하여 전달되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극장에서 보낸 그 석연찮은 박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고급위생저”가 그닥 고급이 아니듯, 왜 우리 극장의 고전희극은 그닥 희극적이지 않은데 우리는 왜 우아하게 웃고 박수 쳤을까. 우리 고전희극의 뭔가 그 구라파스러운 우아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희극성의 전제가 되는 수백 년 전 구라파의 문화, 사회적인 맥락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웃고 박수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오페라글라스를 쓰고 르네상스 극장 박스석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아닐까. 이 기분을 ‘우아함’에서 ‘유식함’, ‘최신흐름을 읽음’, ‘정치적으로 올바름’ 등등으로 확장해보자면 비단 고전희극에만 국한되는 현상일까. 근대사실주의극을, 동시대연극을 보는 우리의 박수는 정확하게 어디를 향할까. 공연에 대한 박수일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트랜디하며 유식한 유러피안 관객인 나에 대한 박수일까.

어쩌면 유럽 중심인 ‘근대’의 구조상, 게다가 그런 근대를 식민지로서 맞은 입장에서, 더욱이 근대의 산물인 사실주의 연극을 중역을 통해 처음 접한 입장에서, 우리의 연극은 필연적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일방적 질서 위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등한 상호적인 교류가 불가능한 시작이었고, 분단 후에는 지정학적으로도 고립되어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는 계급 혹은 특권과 연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국 문화를 접하는 행위는 독점적 특권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맥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오히려 특권 독점을 유지하기 위한 배타적 생태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연극은 처음부터 “고급”이었으며, 그나마 상대적으로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관객과의 눈높이가 맞춰진 지금까지도 여전히 예의 그 ’고급’의 흔적은 남아있다. 오죽하면 “한국의 창작자들은 자신들이 다 유러피안인 줄 안다”라는 자조적 농담까지 있을까.

출처: danceviewtimes.com

유러피안 관객과 유러피안 창작자가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공연하는 동안, 우리의 연극은 상당수의 관객에게 ‘석연찮아’졌다. 이러한 석연찮음에 대한 반작용은 여러 현상을 만들어냈다. 한때 한국적 연극양식을 계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상업극”과 “예술연극”을 무 썰듯 나누는 3.8선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창작자와 평론가가, 평론가와 관객이, 관객과 창작자가 각기 서로를 대상화고 자신의 의견과 취향과 다른 대상을 배척하게 되기도 했다. 우물을 빠져나온 개구리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우물 밖의 세계만이 옳다고 믿는 것은 또 다른 커다란 우물을 만들어낼 뿐이며, 막연하게 우물 밖을 동경하거나 아니면 더 높은 우물을 쌓고 정신 승리하는 것 역시 그 ‘석연찮음’을 외면하는 인지부조화일 뿐이다. 결국에 ‘석연찮음’을 없애는 방법은 석연찮음을 석연찮다고 이야기할 때만 가능한 것 아닐까.

석연찮음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시선의 주체를 인지하는데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그게 유러피안 연극이건 아시안 연극이건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관점과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면 나와 대상의 관계도 고정불변의 닫힌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열린 관계일 것이며, 그래야만 비로소 상대적이고 상호적인 관계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하나마나한 이야기 같은 이런 인식을 근대 이후의 “지식인”들이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지금이 이렇게 석연찮음 투성이였을지도 모른다. 연극 뿐 아니라, 예술 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시스템 전반에 걸쳐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물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물 안과 밖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고 좇고 싶던 유럽에 지옥이 펼쳐지고 있다. 대중음악 공연장에서, 산책을 하던 다리 위에서, 공원에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교회에서 폭탄이 터지고 트럭이 돌진하며, 아파트 하나에 순식간에 불이 번져 일상을 살아가던 우리와 같은 시민들이 허망하게 죽어간다. 헬조선 저편에 헤븐유럽이 있었던 게 아니라, 조선이건 시리아건 유럽이건 이제 일상적 지옥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옥에서 빠져나가 천국을 찾아낼 것이 아니라, 이제 이 지옥을 대면하고 각자의 눈앞의 불길을 해결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렌펠 화재(출처: Euronews.com)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