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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의 무대와 객석 사이]

나를 믿어주는 너를 믿는다

박해성_연출가
124호 2017.09.21
자고로 동서고금으로 현실정치의 주무기는 진영논리라는 점을 바닥에 깔고 바라보자면, 현정부의 인선을 둘러싼 이런저런 드잡이들은 의외로 차분한 수싸움이라고 볼 수 있겠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요 최근 정치사만 들여다보더라도,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일도 청산유수처럼 뻔뻔스럽게 흘러갔으며, 말이 되는 일은 단 한 번도 자연스럽게 흘러간 적이 ...

자고로 동서고금으로 현실정치의 주무기는 진영논리라는 점을 바닥에 깔고 바라보자면, 현정부의 인선을 둘러싼 이런저런 드잡이들은 의외로 차분한 수싸움이라고 볼 수 있겠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요 최근 정치사만 들여다보더라도,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일도 청산유수처럼 뻔뻔스럽게 흘러갔으며, 말이 되는 일은 단 한 번도 자연스럽게 흘러간 적이 없었다. 어차피 모든 진영이 결과를 상정해놓고 그에 맞는 한 수 한 수를 두고 있으니, 각각의 수마다 일관성 있는 논리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할 수가 없는 똥수가 하나 있었으니, 중소기업벤처부라는 신생부처의 장관으로 지명되었다가 십자포화를 맞고 최근 자진사퇴한 어느 독실한 과학자 되시겠다.

지명자가 이사로 몸담았다는 한국창조과학학회 소개 글.
“이 시대 복음 전파의 커다란 장애물인 진화론의 과학적 허구성을 밝…” 읭?

자고로 과학이란 관찰과 추론의 과정이 엄밀하다면 그 결과가 우리의 예상이나 바램, 혹은 믿음을 저버릴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데서 시작한 접근방법이다. 그렇기에 과학이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며 세계를 넓혀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구축된 과학의 세계 역시 한 번에 무너져내릴 수 있겠으나, 그 과정 역시 엄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모든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가 처음부터 동의하는 대전제이다. 물론 가까이는 줄기세포 조작부터 아리안 우성론, 환단고기 어쩌구, 멀리는 스콜라철학까지 결론을 미리 상정해놓고 그 결론에 유리한 데이터와 논리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은폐하여 짜깁기한 “과학”도 있어왔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 어쩌구 시대를 맞아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증언하는 “과학”을 다시 구경하게 될 뿐 아니라, 그런 “과학”자가 유관부처 장관에 걸맞다고 하며, 그걸 보고 지지자들은 가만히 침묵을 지키기까지 하니, 사실 이게 더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리고, 어른 남자 중심의 강한 서사가 흔들리며 다원적 기운이 뿜뿜하던 시절, 정재은 감독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는 스무 살 소녀들이 아슬아슬한 경계의 시기에 서로에 의지하며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네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고 해도 네 편이야.” 참으로 신실한 믿음이다. 그런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애초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고 증거해주는 이들에 의해 존재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대통령을 하건 줄반장을 하건 쇼미더머니에 참가하건, 우리의 자존감과 권위는 우리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에 기반 한다. 어느 순간 그러한 지지와 믿음은 “나를 믿어주는 너를 믿는다”의 훈훈한 순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게 너와 나 둘이서만 마주보고 손 맞잡는 거라면 상관이 없으나, 그 판단과 결정이 다른 이에게 주는 영향이 커지면 커질수록, 위험한 순환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권력이 커질수록, 존재감이 커질수록 진영논리에 의한 “내로남불”성 비판과 수싸움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물론 어떤 비판은 정당하고 의연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비판과 구분하여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이럴 때에는 오히려 지지자들의 비판과 평가가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권력이 커지고 존재감이 커질수록 지지자들은 비판과 평가를 아끼게 된다. 비평이 없어서 받아들이지 않는 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비평이 없는 것인지,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양쪽 다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현실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나를 믿어주는 너를 믿는다”가 필요할 때가 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中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 서울예술청년단, 그외 각종 신진예술지원 등 올해는 유난히도 이제 막 시작하는 창작자들을 응원하겠다는 지원사업이 많다. 이 사업의 지속가능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창작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증거해주는 이러한 사업들이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창작자들에게 존재감과 자존감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한 미덕일 것이다. 물론 이런 창작자들에게 주어지는 비판과 평가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애정어릴 것이고, 때로는 가혹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신진들은 지속적으로 비판받고 평가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평가와 비판이 더 필요한 대상은 따로 있다. 그것은 아마 권력이 커지고 존재감이 커진 창작자들 아닐까.

물론 언뜻 보면 “주요 창작자”들의 작품엔 비평과 관심이 모아지는듯 보인다. 하지만 대개 지지자들에 의한 비평이며, 그런 비평은 여전히 적극적인 응원과 소극적인 걱정 정도에 그친다. 그러니 미학적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지지자들의 비평은 찾아볼 수도 없다. 그렇게 한번 자리 잡은 창작자는 하나의 미학적 갑옷을 장착하게 되며, 갑옷 바깥으로 나가 작은 실패를 할 때마다, 이내 안전한 갑옷 안으로 돌아오게 된다. “믿고 보는 창작자”는 그렇게 자기복제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비평이 없어서 받아들이지 않는 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비평이 없는 것인지, 뭐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소중한 예술자산일수록 순환오류로부터 적극적으로 지켜낼 필요가 있다는 점 만큼은 분명한 듯하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