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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희곡페스티벌, 다섯 번째 <게으름뱅이의 천국>

천생의 배우, 천하의 낭독

변인숙_저널리스트
76호 2015.09.17
올봄에 어느 극장에서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지금 일어나는 온갖 극악무도한 흉악범죄들을 시스템 속에서의 예외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연대나 사랑에서 찾고 있었다.

남산희곡페스티벌, 다섯 번째 <게으름뱅이의 천국>

올봄에 어느 극장에서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지금 일어나는 온갖 극악무도한 흉악범죄들을 시스템 속에서의 예외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연대나 사랑에서 찾고 있었다. 학문적으로 고군분투하는 그의 아우라는 진중한 자세와 묵직한 말투로, 혹은 그 자리 밖에서의 활자로 고스란히 그려졌다. 마치 선인 역할에 충실한, 그리고 그 롤을 더 깊이 파내려가는 배우의 진짜연기와 흡사해 보였다. 강 교수는 “질주하는 자기를 멈춰 세우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지도 못해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고 싶어 하는 사람”(고민하는 힘)을 최근 일련의 무리 색채로 정의한 바 있다. 모두 어떤 ‘화’를 더 높은 열로 데워 달리고 있고, 그 열을 꺼리는 사람들은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남산희곡페스티벌 첫 번째 낭독극 ‘게으름뱅이의 천국’ 배우들을 보는데, 문득 강상중 교수의 인상이 겹쳐졌다. 천생 배우인 낭독자들은 한 명 한 명 모두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고, 관객과 묘한 긴장감을 주고받으며 시대의 뒤틀린 단면을 온기로 채워나갔다.

남산희곡페스티벌, 다섯 번째 <게으름뱅이의 천국>

나노라(이안나), 이배충(이석), 김지년(김수안), 구로기(윤성원), 남자(이갑선), 여자(이지혜), 지문(김정화) 등 7명의 등장인물들은 각기 무거운 짐을 등에 메고 있는 현대인들, 빚을 갚으려 혹은 자기자리를 찾고자 버둥거리는 이들을 ‘프로페셔널하게’ 그려냈다. 끝없이 협박에 쫓기고(김지년) 불신에 발목 잡혀(이배충), 잡을 끈조차 없는 그들. 결국 가닿는 목적지는 어두운 구멍뿐이다. 내일도 어제도 없고 단지 오늘만 있다. 배우들은 그네들의 폭주를 목소리와 눈빛, 침묵, 손짓 등만으로 대본을 들었다놨다하며 전달해줬다. 어차피 없는 내일, 망가지는 게 두렵지 않은 캐릭터들이 간결하고 섬세하게 무대 밖으로 시대를 풍자하고 있었다.

결혼으로 해법을 찾아보지만 남자는 여자를 책임지기 버겁고(구로기), 여자와 남자는 별반 쓸모가 없다(나노라). 엄밀히는 경제적인 스폰서로 서로 작동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돈’으로 돌아가는 회로 안에서 명료한 실체를 찾아 허덕이는 사람들은 그저 외로워 보인다. 성격적 뒤틀림에 따른 분노, 결핍으로 인해 서로를 파멸시킬 뿐이다. 달콤한 마카롱, 교감 없는 섹스, 망상적 자기주문의 희망, 다단계와 대출업체의 회유, 헌금에의 헌신, 이런 것들이 과연 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온전한 위로가 사라진 채, 비틀거리며 관계를 기워가는 성난 부부들의 갈등. 남산희곡페스티벌 게으름뱅이의 천국은 공존할 수 없고, 공존하기도 달갑잖은, 어긋난 시대의 해진 조각을 남겨두었다. 경쟁, 무시, 복수, 증오, 질투 등이 가득한 판 위에서 그저 한판 ‘춤’이나 위태롭게 추면서 견뎌야 할 인물들. 2015년 8월 25일 화요일 저녁 8시, 80분 동안 배우들은 낭독 한판으로 공연 속 시간을 꽉 채워 공연 밖 사람을 위로했다.

게다가 극중에서 무력함을 대표하던 구로기(윤성원)가 희극적으로 그려져 꽤 놀라웠다. 무력감의 탈출구는 유머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 자문했다. 그 어떤 것도 열망하지 않는 피로감에 휩싸여 있을 때, 대체 어느 때쯤에야 에너지를 얻을지 예측할 수도 없는 절망감에 빠진 상황에서, 그 우울의 구멍에서 건져 올려줄 건 사소한 농담과 이를 부추기는 가벼운 포즈인지도 모르겠다. 막중한 일거리나 숭고한 책임감, 거한 선물보다는, 단지 잠시 웃게 할 어떤 대상,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코믹한 감정이 해법 아닐까?

남산희곡페스티벌, 다섯 번째 <게으름뱅이의 천국>

또한 낭독 중 배우 사이의 지문을 모두 한 명의 배우(김정화)가 읽어주고, 심지어 그 배우가 다른 배우들이 격앙된 감정을 노출할 때 그들의 얼굴을 캠코더로 중계해 관객과 한데 보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대본을 무대 뒤에 띄워놓고, 관객이 배우를 배경으로 글자를 함께 쫓는 흐름도 탁월했다. 남산 ‘초고를 부탁해’ 선정작을 같이 읽고 공유하는 그림이, 한 공간 안에서의 긴밀한 공동체성을 만들어내는 듯 보였다.

공연이 한 시간 정도를 넘어섰을 땐 '내가 이 낭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간간이 떠올릴 만큼, 아쉬워지기도 했다. 저 배우들은 오늘 하루 읽어주고 끝이구나, 하는 마음. 소멸하기 위해 내달리듯 마지막 한 줄을 향해 읽어 내려가는 저들이 너무 애틋하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짧은 커튼콜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천생 배우인 이들이 ‘1일’ 천하로 남산극장을 관객들과 공동 소유한 것만 같은 마음, 아련히 지속될 모양이었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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