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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그린피그, 남산예술센터 <치정>

코미디 같지 않은 코미디

김나볏_공연칼럼니스트
80호 2015.11.19
외설과 예술, 윤리와 자유의 문제를 다루는 연극 <치정>이 올 겨울 관객을 만난다. 이 작품은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의 올해 마지막 시즌 프로그램으로,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그린피그가 공동 제작한 연극이다.

그린피그, 남산예술센터 <치정>

외설과 예술, 윤리와 자유의 문제를 다루는 연극 <치정>이 올 겨울 관객을 만난다. 이 작품은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의 올해 마지막 시즌 프로그램으로,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그린피그가 공동 제작한 연극이다. 시기가 공교롭다. 이 작품은 작년에 쓰여졌고 공연 계획이 세워진 것 또한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런데 올해 하반기 들어 예술에 대한 검열이 사회적 이슈로 급부상한 가운데 <치정>은 의도치 않게 올해를 예감한 작품이 되었다.

박상현 작가는 지난 수십년 간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전해진 각종 사건들과 작가가 상상한 오늘날의 모습을 바탕으로 대본을 집필했다. 작품은 하나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신 파편화된 사건들을 마치 꼴라주하는 식으로 구성됐다. 1954년 서울시경 수사부 남덕술 부장의 책상 위에 놓인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에서 시작하는 <치정>은 2015년의 가상 온라인 동호회 ‘한국고고학회’ 채팅창까지 다양한 사건과 사고가 극 중 이어진다. 서로 전혀 관계가 없을 것만 같은 사건의 조각들이 하나로 묶이게끔 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춤과 폭력이다.

그린피그, 남산예술센터 <치정>

치정과 폭력의 세계관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춤이랑 폭력을 엮어냈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그걸 해석해내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던 것 같습니다. 해석한 내용 중 하나는 춤추는 행위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닌데 캬바레 문화와 어우러지면서 춤 자체를 퇴폐적인 것으로 매도했던 시기에 대한 것이에요. 춤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그런 것 같아요. 소위 ‘빨갱이’ 논란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죠. 또 하나 제가 읽어냈던 것 중 치정이라는 상태와 관련된 것이 있는데요. 사랑이 가시화되는 순간은 결국 폭력적으로 구체화됐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가 명확히 그걸 의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런 치정의 상태, 폭력의 상태들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게 결국 소유를 원하는 거잖아요.”- 윤한솔 연출가

읽어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재단해 소화하기도 어렵게끔 단단하고 치밀하게 조직된 대본을 두고 윤한솔 연출가는 결국 정공법을 택했다. 보통의 경우 연출가들은 사건 전개 과정이나 인물 구축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촘촘하게 연출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윤한솔 연출가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더 늘려가면서 그 가운데 공연성을 찾는 식으로 작업에 임했다.

무대에는 13명의 배우들이 등장해 극중 40개 이상의 배역을 소화해낸다. 모든 배우들은 현란한 사교댄스를 소화해내는 가운데 각각 맡은 여러 역할 속에 수시로 들어갔다 금세 빠져나와야 한다. 작업은 한 배우가 소화해내는 역할들만 꿰어도 일종의 기호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됐다. 가령 한 배우가 처음에 소화했던 역할이 누군가를 죽이는 역할이었다면, 다음 번 비슷한 상황에서는 죽임을 당하는 역할을 맡는 식이다. 그게 같은 배우였다는 게 읽혔을 때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처럼 보이게 된다는 게 연출의 설명이다. 관객이 감각의 촉수를 세우고 작품을 관람할 때에야 비로소 극 내용 전체가 선명하게 읽힐 수 있는 구조다.

물론 이런 세세한 기호들을 다 읽지 못하더라도 공연은 충분히 재미있다. 적극적으로 무대를 읽지 않더라도 웬만해서는 놓치기 힘든, 굵직굵직한 감각적 요소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공간 사용 방법만 봐도 충분한 ‘힌트’들이 놓여 있다. 처음에는 빈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되지만 사건들이 발생함에 따라 책상이나 의자 등이 장면마다 들어오는데, 이때 한 번 무대에 들어온 대도구, 소도구들은 무대 밖으로 빠지지 않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결국 배우들은 좁은 공간에서 서로 몸을 부딪히게 되고 결국 무대는 춤을 출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다. 음악도 이같은 효과를 배가시킨다. 무대 위에 밴드가 등장해 초반부에는 트로트 음악들이나 트로트풍의 효과음악들을 연주하다가 나중에는 변형되고 왜곡된 음악을 연주하는 식이다.

그린피그, 남산예술센터 <치정>

치정 같은 정치, 정치 같은 치정

“시절이 하수상하니 시의성을 가지게 되는 거지 이 작품은 사실 완전 코미디거든요. 대사에도 나오듯 소설 하나 썼는데 지령 받고 썼냐, 남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하는 거냐 하는 식이에요. 근데 제가 봐도 지금 이 대사들이 그렇게 안 읽힐 것 같아요. 웃긴 얘긴데 우스꽝스럽지 않을 것 같아요.” - 윤한솔 연출가

<치정>이라는 제목에서 비롯되는 중의적 의미도 이 극을 감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포인트 중 하나다. 치정을 거꾸로 읽으면 정치가 되는데다, 정치극으로 분류될 만한 작품을 여럿 선보인 극단 그린피그 윤한솔 연출의 작품이다. 극은 현재의 정치적 이슈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모든 정치 혹은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충분히 시사성을 띈다. 윤한솔 연출가는 이 극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코미디라고 소개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크게 보면 극은 두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우선 1950년대 소설 '자유부인'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당대의 논란들, 윤리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윤리의 문제가 어떻게 정치화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한 가지는 2015년의 가상현실로 그려진, 채팅창에서 벌어진 치정살인사건이다. 중간 과정을 생략한 소통방식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내용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가당치 않게 웃기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연이 현 세계의 거울이 되면서 우스꽝스럽지만 계속 웃을 수 없는 지점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또 그 지점에서 다시금 웃게 되는, 조금은 이상하고 기묘한 상황이 이제 곧 벌어지려 하고 있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그린피그, 남산예술센터 <치정> 포스터

일시
11월 19일~12월 6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 3시(월 쉼)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작
박상현
연출
윤한솔
출연
황미영, 최지연, 최문석, 정양아, 임정희, 이동영, 유성진, 박하늘, 박기원, 박근영, 김효영, 김문식, 곽동현
문의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