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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놀땅 <벚나무 동산>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절망에 대하여

김슬기_공연저술가
80호 2015.11.19
나는 체홉에게서 그런 미덕을 보고 싶다. <벚나무 동산>은 승리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시대 앞에서 무력할 수도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그리고 있다. 절망이 갖는 힘, 절망스러워도 지속되는 삶, 그런 것에 나는 마음이 끌린다.

극단 놀땅 <벚나무 동산>

나는 체홉에게서 그런 미덕을 보고 싶다. <벚나무 동산>은 승리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시대 앞에서 무력할 수도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그리고 있다. 절망이 갖는 힘, 절망스러워도 지속되는 삶, 그런 것에 나는 마음이 끌린다. 몇몇 움직임 장면의 연습을 막 마친 최진아 연출과 마주 앉아 최근 근황을 물으며 작품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읽은 체홉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어째서 이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하면서도, 그런데 ‘이런’ 시대에 ‘이런’ 작품을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조적으로 반문했다. 연극계가 시끄럽다.ㅡ한국 사회가, 전 세계가 어지러운데, 그런데, 연극계가 시끄럽다, 라고 말해야겠다ㅡ 그런 와중에도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매순간 이런 자조적인 질문을 곱씹으며 연습실과 극장을 오간다. 공연을 소개하는 글을 써야 하는 처지도 당연히 기껍지가 못하다. 오롯이 공연 얘기만을 잘해내면 되겠으나 본격적인 작품 소개를 하기에 앞서, 최진아 연출과 극단 놀땅, 그리고 이 공연을 위해 애쓰고 있는 많은 분들, 더불어 이 연극을 궁금해 하고 있을 독자와 관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감히 여기 이 지면의 몇 줄을 훔친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이렇게’ 연극을 하고 있다.

진짜일 수밖에 없는 가짜의 영역

극단 놀땅 <벚나무 동산>

그간 극작과 연출을 병행하며 자신만의 연극 언어를 찾아오던 최진아 연출이 지난 해 카뮈의 <칼리큘라>를 공연하더니, 이번엔 체홉의 <벚나무 동산>을 꺼내 들었다. 카뮈의 텍스트로 연극을 만들면서 잘 쓰인 희곡을 연출한다는 것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는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희곡을 무대화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가능성과 한계들 사이에 놓여 있는지 절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연극이란 삶의 일부분을 무대에 올려놓고 진짜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연극임을 전제했을 때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작품을 하면서 제일 먼저 극복해보고 싶었던 건 사실주의의 지루함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극적인 과장이나 연출적인 코드를 넣으면서 새로운 시도들을 해봤는데 체홉 그 자체가 너무 튼튼하고 완고해서 그 모든 것들이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되더라. 그래서 그것들을 다 빼버리고 나면 또 다시 체홉의 사실주의만 남게 되고, 결국 나의 연극하기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나는 그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 너무 시각적으로만 연극을 하려 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 거다. 지금은 어떤 상징 같은 것을 찾아내고 그걸 연출적으로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 중에 끊임없이 연출 방향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주문하는데도 배우들이 지치지 않고 딱 맞는 것들을 함께 찾아주고 있어 고맙다는 얘길 하고 싶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의 내일

<벚나무 동산>은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홉이 생애 마지막으로 집필한 희극 작품이다. 총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이야기는 변화해가는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벚나무 동산의 지주 류보비 부인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오가며 전개된다. 때는 농노해방이 된 지도 이미 오래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지를 버리고 떠난 채, 늙은 하인과 몇몇 식솔들만 간신히 남아 집을 지키고 있다. 허나 막대한 부채로 인해 벚나무 동산은 곧 경매에 넘겨질 위기에 처해 있고,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류보비의 농노였으나 이제 그 자신은 돈 많은 상인이 된 로빠힌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별장 대지로 팔 것을 제안한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류보비는 자신의 모든 영예와 추억이 깃든 아름다운 벚나무 동산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렇게 경매일이 다가온다. 작품에 등장하는 류보비의 선택이 우리와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계속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살아간다. 분명 현재의 어려움을 돌파할 길이 있고 주변에서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는데 정작 본인에게는 그게 정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굉장히 의미 있고 아름다운 거지만 이 시대에 이미 무용해진 것, 그걸 놓지 못함으로써 나는 계속 뒤처지고 구석으로 몰리는데도 도저히 그걸 버릴 수가 없다. 이것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절망에 에너지가 있다고 믿는다.

극단 놀땅 <벚나무 동산>

이 공연의 무대에서는 실제로 광활하고 아름다운 벚나무 동산이 쓰러지지 않는다. 그 대신 무도회에서 멀쩡히 춤을 추다 쓰러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샹들리에도 천장에 걸려 위태롭게 사람들을 현혹하는 게 아니라 눈앞에서 길을 막고 거치적거려 원래의 제 기능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연극의 마지막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답답함과 꽉 막힌 듯한 닫힌 집을 표현하기 위해 벽을 이동하려고 계획 중인데, 공연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그 구현 방법을 고민할 거라고. 물론 그렇다고 이 <벚나무 동산>이 체홉과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최진아 연출은 어떻게 하면 보다 온전하게 체홉을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100년도 더 전에 쓰인 희곡이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극단 놀땅의 <벚나무 동산>이 그 특유의 연극적 반짝임으로 다시 한 번, 체홉을 소환한다.

[사진: Play for Life 제공]

극단 놀땅 <벚나무 동산> 포스터

일시
11월 20일~12월 6일 평일 8시, 주말·공휴일 4시, 화 쉼
장소
선돌극장
작
안톤 체홉
연출
최진아
출연
장용철, 신덕호, 나종민, 이준영, 주혜원, 남수현, 김정, 송치훈, 박윤서, 박인지, 유경훈
문의
010-2069-7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