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프로젝트 <폭스파인더>
‘여우’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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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 ‘사이’의 복도식 무대에서 사건을 목격한다. 초조한 빗소리와 상아색의 강한 색조명은 낯설다. 오직 청각과 끼얹은 듯한 노오란 물감은 하얀 공간, 작은 문들이 뚫린 흰 벽을 덧입힌다. 이러한 연극적 장치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을 추리하는 탐정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고 자신과의 거리, 타인과의 거리를 만들어냄으로써 현재 스스로 생각하는 자아의 활동과 일치된다.
무대 중앙에 놓인 벤치에 엇갈려 서로를 등지고 앉아 있는 사무엘, 주디스 코베이 부부. 이 둘은 각각 다른 생각의 미로에 빠진 듯, 폭스파인더(foxfinder)의 방문을 기다린다. 그리고 등장하는 윌리엄(폭스파인더)은 형식적이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여우’의 존재를 탐색하기 위해 부부를 취조한다. 그의 목적은 분명하다. 농장물의 수확이 부쩍 줄어든 코베이 부부의 농장에 침입했을지도 모르는 여우를 찾는 것이다. 행위가 곧 목적이다. 여우의 존재를 찾기 위해 세뇌교육을 받은 그이지만 사실 그는 여우를 본 적이 없다. 애초부터 여우의 실재는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찾는 행동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여우의 대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윌리엄과 코베이 부부는 폭스파인더와 닮아있다. 습관적 의식을 치루고 싶을 뿐이다. 윌리엄은 보고서는 올리는 일을, 코베이 부부는 안정을 유지하는 일을 도모하고 싶다. 하지만, 이들이 긍정하고자 혹은 부정하고자 했던 ‘여우’에 대한 각각의 믿음은 결국 그들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여우의 존재를 부정하므로 오히려 그 존재를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주디스의 친구 사라는 바이러스와도 같은 여우의 대한 믿음으로부터 자신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녀는 여우라는 허구의 존재를 이용하여 농장을 탈취해가는 정부를 고발하며, 단순히 ‘여우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우는 ‘거짓’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감한 여성이다. 윌리엄의 죽음으로 폭스파인더가 사라졌다. 즉, 여우의 존재를 확증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그러나 변화된 것은 없다. 결국 주디스와 사무엘 부부는 새로운 폭스파인더를 기다린다. 결국 여우는 코베이 부부가 사는 세계의 체제를 유지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마냥 주디스와 사무엘 부부를 비판할 수 있을까? 그들은 윌리엄과 같이 성실한 사회원이었을 뿐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사회의 여우를 찾기를 원하는가? 공공연하게 여우의 탐색작업을 벌이면서 여우의 거짓과 진실의 문제보다는 여우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하지는 않는가? ‘여우’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은 외부의 누구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니고, 흙으로 덮어 은폐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부재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고발해야하는 일이 먼저다. 여우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여우는 죽어있을 뿐이다.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