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58_모두를 위한 레지던시 <벌거숭이들-퇴장>
재난 통에 벌거숭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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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달린 방으로 약속된 이 공간에서, 남자와 여자가 방안을 소요하며 <벌거숭이들-퇴장>을 읽는다. 두 사람이 내뱉는 말들은 이불 깔린 방 위에 또 하나의 공간, 말들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관념적인 단어들이 시각적이고 청각적으로 세워졌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말의 출구가 되는 남자는 신경쇠약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 보일 수밖에 없다. 남자의 우울은 먼 곳의 기억들과 함께 자꾸만 침잠한다.
- 채민
- <벌거숭이들-퇴장>은 원작이 김태용 작가의 장편소설 『벌거숭이들』이죠. 왜 이 텍스트를 선택하셨나요?
- 최창근
(연출) - 김태용 작가와는 2년 전에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함께 작업한 적이 있어요. (김태용 작가의 글에는)특별한 서사 구조가 없잖아요. 하지만 말이 주는 울림, 음악적인 느낌, 그런 강렬한 느낌이 있었어요. 이 공간에서 연극을 하나 하고 싶은데… 그때 떠올랐어요. 이 작품은 작가가 제안한 거예요. 지금 이 시기(겨울이라는 계절과 공간이 가진 맥락)에 맞더라고요. 첫날에는 배우가 ‘눈이 내리고 있지’하는데 거짓말처럼 눈이 내렸어요. 극장과 관련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무대효과처럼요.
불이 꺼지고 창밖의 불빛이 아무렇게나 들어온다. 지나가는 차들의 라이트가 어두운 공간을 훑는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이 공간에 앉아 속도감을 느낀다. 방이 아닌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남자와 여자가 다시 대사를 시작한다. 잘 들리지 않던 말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 채민
- 최창근 작가님은 극작가시고, 김태용 작가님은 소설가잖아요. 이번에 소설을 희곡화하는 작업은 누가 하셨나요?
- 김태용
(작가) - 거의 작품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1부, 2부… 앞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읽어오면 남자가 헛소리를 하면, 여자가 잡아오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3부만 가지고 하다 보니까 그게 잘 안살더라고요. 암전 상황에서의 대사는 많이 고친 거예요. 공연을 위한 대본 작업을 하면서는 이 공간을 많이 생각했어요.
- 채민
- 최창근 작가님은 이제까지 작업하신 걸 보면 낭독 공연에 매력을 많이 느끼시는 것 같아요.
- 최창근
(연출) - 이번 공간은 단순히 낭독 공연 이라기보다는 연극을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방에서 남녀가 대본이 아닌 책을 읽는 콘셉트로요. 텍스트가 관념적이라 배우들이 작업하면서 분명 힘든 점들이 있었을 거예요.
- 이난형
(배우) - 텍스트에 서사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우리 공연에는 블로킹이 없어요. ‘마지막에 (두 사람이) 붙는다.’, ‘함께 우유를 마신다.’ 이 정도만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매일 공연이 달랐어요.
- 채민
- 그렇다면 연출님은 무엇을 해주셨나요?
- 이난형
(배우) - 연출님이요? 공연 중간에 사라진 적도 있어요. (웃음) 처음에 텍스트를 받았을 때는 당황했어요. 앞을 다 떼고 3장만 봤으니까요. 그래서 1, 2장을 다 봤죠. 그러고 나서도 당황스럽더라고요. (웃음) 대화체가 아니라 어려웠어요. 그런데 여러 번 읽다보니까 리듬감, 운율감이 있더라고요. 작가님이 예상을 하신건지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니 제가 의도 하지 않아도, 몸이 그렇게 움직여지는 것 같아요.
- 감태용
(작가) - 저도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처음 봤어요. (웃음)
- 최창근
(연출) - 공연이 진화 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감이 있어요. 관념적인 것인데 그걸 배우들이 표현해야 하니까요. 주어진 틀 안에서 배우들이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많은 것을 끌어냈어요. 하루하루가 과정인 것 같아요. ‘연출하지 않은 연출’로서 보면 배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연 마지막 날이 기대가 돼요.

눈앞에 서 있는 그들은 배우다. 무대로 상정된 이 공간에서도 배우고, 그들이 내뱉는 말들의 세계 속에서도 배우고,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위에서도 배우이다. 마치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무대 밖의 공간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사건과 감정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짠 옷을 입고 또 그것들을 벗어내며 ‘절대로 무대에서 내려오지 말기’를 ‘선택’한다.
- 최소연
(대표) - 9년 전 테이크아웃드로잉을 만들었을 때 꿈이 있었어요. 사소하고 작고 그런 거였는데…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현대 미술을 전공했어요. 전시도 하고 기획도 하면서 최종 전시물뿐만이 아니라, 창작자들의 작업 과정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예술가들을 지속가능하게 서포트할 방법으로 플랫폼을 만든 거죠. 두 가지 원칙이 있었어요. 두 달 동안 이곳에 체류할 것, 빈 몸으로 오되 여행 가방에 주제를 들고 올 것. 이들이 싸가지고 온 주제에 대해서 두 달 내내 함께 고민하는 것. 이것이 테이크아웃드로잉이 가진 정체성이었어요.
피고인, 임차인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그들이 만든 무대에 저를 세우고, 벌거숭이로 만들었어요. 숨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강제집행, 언론플레이로 인해 유명인들에게 보상금 뜯어먹는 임차인 만들기… 제가 겪고 있는 수치와 모욕을 사람들에게 전부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큰 재난이 몰려오더라고요.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밖에 나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만나) 보니 어처구니없는 건물주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들은 본인들의 건물에 어떤 ‘공간’이 있는지, 그것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어요.
무대에서 도망가고 싶었는데 도망을 갈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곳을 방주라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다들 오는데, 다 함께 몰려와서 수모를 당하는 수밖에 없는데도 오더라고요. 최창근 작가도 그 중 한 사람이고요. 저는 다 내려놓고 재난 선포를 했어요.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 작업을 했어요. 이전에는 제가 기획자, 참견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세상에 의해 굴러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 채 민
- 재난 이전과 이후가 있네요. 이후의 예술은 어떤 걸까요? 어때야 할까요?
- 최창근
(연출) -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이라는 유고슬라비아 희곡이 있어요. 유랑극단인데 전쟁 속에서도 한 마을에 들어가서 연극을 해요. 대사 중에 ‘전쟁이 일어나도 연극은 계속된다.’라는 게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라도 연극은 계속된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게 연극이 존재하는 이유 같기도 해요.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라는 거죠.
- 김태용
(작가) -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아요.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맥락을 지닌) 이곳이 작업 공간이라는 거죠. 공간이 안고 있는 문제를 가지고 대본을 프로파간다 식으로 바꿀 수도 있었겠죠. ‘우리 ~하자!’라는 식으로, 좀 더 대중적인 언어로 바꿀 수는 있었는데 그렇다면 꼭 제가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제가 괴로워하면서 썼던 글. 그 글이 이 공간의 맥락과 만났을 때의 충돌. 이런 것들이 궁금했어요. 물론 그 충돌을 느꼈고요, 앞으로도 이 공연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요. 작가적인 즐거움이 있어요. 보통 골방에서 쓰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 좋아요. 좋은 에너지인 것 같고, 다음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해요. 혼자만의 텍스트가 아니라서 좋아요. 다음 텍스트는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게 돼요.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롭지 않은 이곳에서 예술은 빛을 발했다. 예술은 그런 곳에서 꽃을 피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곳 보다는 전쟁터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보다는 불모지에서 명민하게 뿌리내린다. 그렇게 존재의 이유를, 가치를 증명한다.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들처럼 공간을 보고 찾아온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업을 보러오는 관객들에 의해 이 ‘건물’은 의미를 가진 ‘공간’이 된다. 그리고 재난 통에 사라져도 영원히 남을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 이름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이다.
[사진: 테이크아웃드로잉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