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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F연극페스티벌>

소재의 독특함이 다는 아닌… 연극제가 되기를

유혜영
86호 2016.02.18
거리에 흔한 빌딩 하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눈앞에 있는 작은 책상에서 티켓을 받는다. 고개를 돌리면 마치 내 방문 같은 극장 입구가 있다. 객석도, 그 앞의 무대도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다.

<2016 SF연극페스티벌>< 프눌과의 전쟁 아날로그SF epi.Ⅰ>

거리에 흔한 빌딩 하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눈앞에 있는 작은 책상에서 티켓을 받는다. 고개를 돌리면 마치 내 방문 같은 극장 입구가 있다. 객석도, 그 앞의 무대도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다. 천장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테이프가 힘겹게 라인들을 붙잡는다. 연극이 쌓인 시간, 그 시간의 흔적, 대충 낭만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소극장만의 무심함이 있다. 그리고 긴장된 입김이 있다. 대학로의 축제란 종종 이렇게 무심한 듯 뜨겁다. 페스티벌 전문극장을 표방하는 소극장 혜화당이 기획한 축제의 타이틀은 SF다. SF는 소설이나 영화로 이미 익숙해진 장르지만 여전히 눈길을 끈다. 기상천외한 상상이 과학을 힘입어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은 알수록 흥미롭고, 잘 몰라도 재미있다. 게다가 과거와 현실을 주로 이야기하는 연극무대에서 ‘가능한 미래’를 엿보게 된다는 것은 판타지와도 또 다른 감동을 줄 것이었다. 끌릴 수밖에 없다.

<2016 SF연극페스티벌><시뮬라시옹>

축제에 오르는 작품은 총 3개다. <프눌과의 전쟁 아날로그SF epi.Ⅰ>, <시뮬라시옹>, <러브포션넘버나인>. 단어들의 출처부터 궁금해지는 남다른 제목이다. 작품들은 하루에 두 편씩, 조합을 바꿔 일주일에 한 세트로 3주간 공연되었다. 관객들은 한 자리에서 두 작품을 연속으로 관람할 수 있어 일반 연극과는 다른, 나름대로 축제의 풍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작품인 <프눌과의 전쟁 아날로그SF epi.Ⅰ>은 프눌이라 불리는 외계인의 지구침략을 소재로 한다. 엄청난 스펙터클을 예상하게 하는 소재지만 연출은 바로 그 부분을 연극적 재미로 채우고자 한다.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SF 작가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구성과 메시지도 놓칠 수 없다. 딕의 소설들을 계속 시리즈물로 제작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후에도 만나볼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철학수업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그 음성적 특이함 때문이라도 기억하고 있을 만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은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이자 주제이며 구성이고 인물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소유할 수 있게 된 우리의 삶이 어쩌면 가상으로만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소름 돋는 암시다. 작품의 절반 이상이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배우의 설명으로 이루어지는데, 모든 대사는 무대 뒤에 자막으로 제공되고, 강한 사운드와 배우의 목소리가 속도감 있게 극장을 흐른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에 대한 해석과 ‘시뮬라크라’라는 개념 소개, 지도 만드는 장인들이 등장하는 보르헤스의 소설 인용, 그리고 모든 인물이 사실은 ‘가상실재(허상)’였다는 반전까지. 30분가량의 짧은 작품이었지만 모든 소재와 행동이 일관된 논리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구성력이 돋보였다. 사실 SF 장르가 흥미로운 이유는 생소한 과학지식을 텍스트에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적용 가능한 서사로 녹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은 과학지식 자체를 전면에 배치하고 아예 설명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그것은 개념을 강화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갖게 하지만, 소개하는 개념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개념이 함의하는 메시지마저 익숙한 방식으로 다시 접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흥미를 잃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2016 SF연극페스티벌><러브포션넘버나인>

마지막으로 공연되었던 <러브포션넘버나인>은 세 작품 중 가장 일상과 가까운 공상, 현실과 가까운 미래를 보여준다. 치밀한 과학적 분석으로 만들어진 약물이 인간의 감정이나 본능을 조절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처방이 필요한 ‘우울증 치료제’부터 각종 피로회복제, 가볍게는 커피까지도 인체에 흡수되는 화학물질 조절을 통해 미세한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오묘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약물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러브포션넘버나인’. 반복되는 부부싸움을 견디다 못해 약을 처방받은 부부는 점점 더 많은 양의 약을 먹게 되고, 자칫 효과가 떨어져 서로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될까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 날, 아내가 약 복용을 중단하기로 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다시 찾게 된다는 것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해 준 ‘러브포션’ TV 광고 장면은 과장된 연기로 객석의 웃음을 유도하지만, ‘사랑’마저 상품이 되어버린 씁쓸한 미래 또한 슬며시 건낸다.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모성애까지 도전하는 약물의 유쾌한 자신감은 곱씹을수록 불편하다. 그러나 아내 역의 긴 독백들이 작품의 사건과 정서 모두를 이끌고 가는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기에, 부부의 갈등이나 가족의 화해가 깊은 공감을 얻기 힘들고, 익숙한 듯한 시적 표현들은 우리의 감정만을 부추긴다.

<2016 SF연극페스티벌>

복잡한 화학물질의 이름이 일상 대화에서 오가고, 손안에서 확인하지 못할 정보가 없는 시대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외부저장장치의 발달은 ‘포스트휴먼’ 담론을 쉽게 증명해내며 과학을 일반화시킨다. SF에 대한 관심은 이 같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계속되고 있다. SF연극페스티벌은 ‘친근하면서도 궁금한’ SF 장르를 연극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시도였다. SF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외계인과의 대결은 물론, 이미 일상과 밀접한 빅데이터나 약물의 문제를 다루며 여러 방향에서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다만, 작품들이 소재 자체의 매력을 뛰어넘는 새로운 질문과 의미를 생산하고, 타 매체들과 차별화되는 연극적 실험을 보여주었는가 하는 점에서 큰 아쉬움이 남는다. 이후에는 더욱 신선한 발상과 깊이 있는 서사로,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SF의 언어를 시도하는 축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사진: SF연극페스티벌 사무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