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아오병잉 페스티벌>
‘이 시대 무용한 예술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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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최씨 <아버지의 그네>
‘아시아-오프-병맛-잉여 페스티벌’(이하 아오병잉)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던 곳은 혜화의 거리도, 연극 예매 대행 사이트도 아니었다. 대면은 ‘아오병잉’이라는 수상한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초대받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SNS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신생공간들과 비슷한 종류의 페이지인가 싶어 ‘아오병잉 페스티벌’이라는 것이 진짜 페스티벌인지(?) 궁금한 마음으로 타임라인을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결과 포스터와 타임 테이블을 통해 학술대회까지 열린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결국 이 페스티벌이 진짜라는 확신을 내리는 것은 입금계좌가 실제로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가능했다.
아오병잉의 겉모습은 타 페스티벌들과 꽤나 유사하다. 하지만 그 껍질을 벗겨내고 내용을 살펴보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옥인 콜렉티브’와 ‘슬기와 민’을 연상시키는 주최측의 이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굿-즈>를 연상시키는 디자인과 이름의 ‘뱃-즈’, 그리고 차이밍 량, 가네샤, 액트 오브 힐링 등 일관되게 엇나가는 내용을 보고 나서야 허구의 콘텐츠임을 짐작하게 되는 ‘Asia Fest’ 등. 뒤에야 가능했다.
그 기묘한 느낌은 직접 공연장에 찾아와서 보아도 여전히 지속된다. 주최측은 여느 페스티벌들처럼 관련 굿즈를 판다. 하지만 그 ‘굿즈’는 예술경영지원센터, 프린지페스티벌 등 타 예술기관/단체들의 물품 위에 아오병잉 스티커를 ‘붙인’ 것들이다. 이와 같이 아오병잉의 콘텐츠들은 모두 교묘하게 어그러진 패러디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일련의 행위들은 아오병잉 공연장 앞에 서 있는 ‘이 시대 무용한 예술을 하자!’라는 글귀로 마무리된다.
신민 <가성비 甲>
이 시대에 대해 말하는 예술을 하자
‘이 시대 무용한 예술을 하자!’.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라는 문구와 반대 지점을 바라보는 것 같은 선언은 아오병잉의 패러디가 그저 산발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의도를 중심으로 실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이 의도는 아오병잉에서 선보이는 공연들에서도 이어진다.
기성 연극계의 무대 위에는 긴장감을 느슨하게 하는 것으로도 지울 수 없는 엄숙함이 배어 있다. 그 엄숙함은 주로 어느 시간대에서나 논의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주제, 그리고 완전한 미학을 향한 치열함에서 비롯되곤 한다. 하지만 어느 시간에서나 논의될 수 있는 큰 주제를 다루려는 마음은 종종 이 시간대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혹은 반드시 논의해야 하는 세부적인 의제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촘촘한 무대 공간 조성은 완벽한 몰입을 가능케 하여 큰 감동을 이끌어 낼 수도 있지만, 가끔은 철저한 몰입으로 인해 관객들이 연극을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별개로 여기는 착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오병잉 속 무대의 공기는 엄숙하기보단 한없이 느슨하다. 동시대인의 삶을 부루마블 게임처럼 압축해서 표현한 공연도 있고, 연극을 올리기 위한 연습과정 자체를 연극화 한 작품도 있다. ‘혼이 비정상’이 된 아버지를 다룬 판소리극이 공연되고, 비숙련 반복노동을 통해 구축한 자신의 작업을 ‘가성비 갑’이라고 말하는 작품이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연극적 완결성을 향해 스스로를 몰아넣기보단 이야기를 잘 풀어낼 수 있는 각자만의 방식을 이용하여 이야기하길 택한다. 이와 같이 아오병잉의 공연들은 기성연극이 간과해 온, 혹은 다루지 않았던 동시대의 감수성을 끌어와 독자적인 방식으로 무대 위에 올린다.
창작집단 Hereyouare <곳>
누가 쓸모없음/있음을 가르는가
이 페스티벌에서 선보여지는 공연들은 기성 연극계의 무대나 기금지원에선 좋은 결과를 얻어내긴 힘들 것이다. 오히려 ‘오프예술’이라고 불리거나 ‘병맛’스럽다는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다. 이를 통해 아오병잉이 ‘페스티벌’ 자체를 망라하여 전하려는 의도가 얼추 정리되는 듯하다. 아오병잉의 작품들은 권위, 기관들에 의해 예술이라고 호명되기엔 사적이라고 평가받을 법한 주제들을 느슨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이 시대 속 배우로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이 시대 속 배우로 활동하며 궁금했던 것들, 이 시대 속 자신의 위치, 노동과 유희로 요약하는 이 시대 속 청년들의 삶 등. 예술로서 ‘쓸모 있음’을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은 아오병잉의 이름 아래서 스스로를 ‘잉여’임을 자처하는 데에 도달한다.
하지만 결국 아오병잉의 작품들을 바라보는 이들은 이 시대를 살아나가고 있는 관객이다. 그들은 연극계의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작품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즉, 기관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관객들은 이 페스티벌에 이름을 보고 의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이 페스티벌은 왜 스스로를 오프예술이라고 부르는가? 왜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가? 그리고 결국 이런 질문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다- 누가 이 예술가들을 잉여라고 부르는가?
배인숙 <다른 쓰임>
쓸모를 증명하는 ‘무용한 예술’을 하자
아오병잉은 동시대 속에서 주류예술과 비주류 예술을 나누는 순간 발생하는 경계, 즉 주류-비주류 예술 사이에 놓인 간극에서 발생한 무언가를 잡아내어 페스티벌로 만들었고, 그 무언가의 정체를 ‘오프예술-병맛-잉여’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누가 잉여이며, 누가 쓸모 있음과 없음을 가르는지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무용예술’ 슬로건이 지속 가능성을 담은 ‘선언’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증발해버리는 ‘발화’였다는 것은 조금 아쉽다.
공연의 묶음이었던 아오병잉 페스티벌은 끝나지만, 그 선언은 증발하지 않은 채 많은 ‘잉여’ 연극인들을 묶어주는 힘으로 남았으면 한다. 더 부지런히 ‘쓸모없는 예술’의 ‘쓸모 있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잉여’로 남은 공연들을 더 바삐 공연장으로 불러 모으자. 여러 신생공간들의 느슨한 움직임이 <던전>으로 모이고, 그 움직임이 <굿-즈>로 이어지고, 결국 <서울바벨>까지 온 것처럼, ‘잉여’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을 하자.
[사진: 아오병잉 페스티벌 사무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