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인복지재단 <2016 옆집에 배우가 산다 - 박정순 ‘아버지의 불매기’>
집을 찾은 배우들, 삶을 엿본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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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 고민하는 건 젊은 창자자의 몫만은 아닐 터, 정통극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중견 연극인들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한평극장’ 이라는 이름으로, 배우의 '집' 이 문을 열었다. 상업극과 젊은 대중에게 극장을 내어주고 있는 시대에, 말 그대로 삶의 공간이 예술의 터전이 된 셈이다. 연극인복지재단에서 진행하는 본 프로젝트는 “옆집에 배우가 산다” 는 친근한 카피로 이웃관객과 마을주민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골목, 일반 가정집 3층에 자리하고 있는 극장 ‘화랑방’ 을 찾았다. <아버지의 불매기>를 직접 쓰고, 연출하고, 출연한 박정순 배우(극단 화랑방 대표)의 집이다. 이웃집 아저씨의 방(房)인지 예술가의 창작스튜디오인지 느낌이 묘하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옛 가족사진도 있고, 강렬한 색감의 추상화도 걸려있으며, 지난시절의 배우가 출연했던 공연의 포스터도 붙어있다. 공연의 소품으로 쓰일 것 같은 장독대 옹기들도 모여 있고, 천장에는 조명기도 달려있다. 소극장 세트를 압축해놓은 듯한 무대 배경에 절로 눈길이 간다.

문을 열고 등장한 박정순 배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으로 이어지는 삼대(三代)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새마을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지난한 역사와 개인의 삶이 맞물리면서 극적인 가족사가 펼쳐진다. 옹기를 굽는 독쟁이 할아버지는 천주교를 받아들이며 박해를 받았고, 조선이 일제에게 합병당하자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난다. 가업을 이은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길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귀향하게 된다.
작품은 “나는 나의 존엄성을 믿는다!” 고 선언하며 더 넒은 세상으로 뛰쳐나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웅담을 그리는 듯 했지만, 실상은 역사의 풍파에 무너지는 인간과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은 독을 막아주는 큰 독인 ‘불매기’ 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의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된 오씨일가는 항아리에 덧댄 저고리로, 나풀거리는 나비로, 눈을 껌벅이는 인형으로, 그리고 유골함 상자로, 깨진 사금파리 조각으로 표현되었는데 비극적 사건과 연극적 상징이 어우러져 깊은 연민을 자아냈다.
1인 다역을 연기한 박정순 배우는 관객들에게 재주를 부리는 희극적인 광대가 되었다가, 비극적인 역사의 증언자가 되었다가, 마침내 상주(喪主)가 되어 떠나보낸 가족들을 위해 제를 올린다. 공연의 마지막, 식구들을 한 몸에 담고 세발자전거를 끌며 퇴장하는 순간은 이 작품의 명장면이었다.

잘 들여다 보면, 극중인물이 몸 담았던 ‘옹기장이’ 라는 역할은 ‘연극쟁이’ 로 살아왔던 배우의 인생과 겹쳐 보인다. 자신의 존엄을 위해, 혹은 존재이유를 찾기 위해 타지(극장)를 떠돌았던 예술가가 이제 다시 ‘집’ 에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 또한 역설적이다. 소중한 것은 먼 곳에 있지 않고 곁에 있었음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존재가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삶을 더욱 값지게 하는 위대한 도구로서 ‘옹기’ 이기도 하고 ‘예술’ 이기도 할 것이다.
배우는 작품을 통해 관객 자신의 삶을 되살펴 보게 했지만, 또한 관객들은 공간 너머 배우의 삶을 슬쩍 엿보기도 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극장을 꾸미고, 그 안에서 연습을 진행하고, 그 안에서 홀로 다양한 무대효과를 고민하고 있는 배우를 생각하니, 그 준비의 시간들이 사뭇 숭고하게 느껴졌다. 집을 극장으로 탈바꿈한 이 프로젝트의 진짜 의미는 예술가와 관객이 삶의 생생한 흔적을 나누면서, 예술을 통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를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대의 연극은 사이즈를 키우는 ‘대중성’이나 성과에 집착하는 ‘공공성’ 보다는 소통을 중시하는 ‘관계성’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배우와 한데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끊임없이 나오는 안주와 화젯거리에 극장은 만남의 장소로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티켓을 끊고 지정된 좌석에 앉아 시야에 확보된 작품만 체험하고 돌아서는 지금의 극장문화와는 다른,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랑방 분위기랄까. 예술가와의 대화가 깊이있게 이어지고, 극본과 무대에 대한 논평도 오고갔다. 자연스레 무대와 객석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다. 그 자리에 관객으로는 배우, 작가, 연출가, 비평가, 기획자, 기자가 함께 있었으니 살아있는 연극 학교라고 불려도 무방하리라.
‘옆집에 배우가 산다’ 프로그램은 배우 박정순의 <아버지의 불매기>를 비롯하여 전위연극과 실험극으로 이름난 퍼포머 심철종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배우로도 잘 알려진 연출가 김동수의 <인생>, 그리고 이번에 여배우로는 처음 참여하게된 중견 여배우 윤예인의 <미친엄마, 진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달에 두어번, 배우의 집이 열리니 그 시간을 놓치지 마시길. 지역민을 비롯하여 연극동네를 벗어나고픈 관객분들 그리고 생존을 고민하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멋진 선배님들이 보여주는 ‘한평극장’ 을 추천하는 바이다.

[사진: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