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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 & 극공작소 마방진 <곰의 아내>

이런 세상,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는 자 누구인가

김슬기_공연저술가
94호 2016.06.23
숲에서 길을 잃은 한 소녀가 곰과 함께 살다가 그 아이를 낳았다. 곰과 소녀와 아이는 행복했으나, 사냥꾼은 그들의 동굴을 찾아가 사람의 새끼도, 짐승의 새끼도 아닌 아이를 죽이고 소녀를 마을로 데려왔다. 그 후 곰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가르는 날이면 어김없이 갈가리 찢긴 인간의 몸뚱이들이 숲에서 발견되었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소녀...

숲에서 길을 잃은 한 소녀가 곰과 함께 살다가 그 아이를 낳았다. 곰과 소녀와 아이는 행복했으나, 사냥꾼은 그들의 동굴을 찾아가 사람의 새끼도, 짐승의 새끼도 아닌 아이를 죽이고 소녀를 마을로 데려왔다. 그 후 곰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가르는 날이면 어김없이 갈가리 찢긴 인간의 몸뚱이들이 숲에서 발견되었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소녀를 다시 인간 세상에 길들이려 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소녀는 곰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어둠을 틈타 간신히 동굴로 돌아왔지만, 곰은 이미 모든 흔적과 냄새마저 지우고 그곳을 떠난 후였다. 바로 그 소녀 앞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소녀는 남자의 목숨을 구하고 그와 함께 곰을 찾아 나서지만, 이제 그들의 삶은 서로를 옭아매기 시작하고 그렇게 곰의 아내는 또 다른 동굴을 찾아 들어가고야 만다. 2015년 제5회 벽산희곡상 수상작, 고연옥 작가의 <곰의 아내>(원제: 妻(처)의 감각)가 남산예술센터의 시즌 프로그램으로 고선웅 연출을 만났다.

짐승 같은 삶에 대하여

<곰의 아내>의 원작 희곡은 지난 몇 년간 신화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로부터 현실을 되비추려 했던 고연옥 극작의 결실을 증명하는 작품 중 하나로, 『삼국유사』의 웅녀 신화를 모티프 삼아 그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신화적 상상력을 끌어들여 현실의 비정함을 꼬집는 이 작품은 ‘곰의 아내’라는 매우 기이한 인물을 통해 사람 아닌, 사람인 이상 그래서는 안 될, 혹은 차라리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싶은, 말 그대로의 ‘짐승’ 같은 삶에 대해 되묻는다.
사람의 손에 자기 아이를 잃은 곰의 아내는 다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그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숲을 빠져나와 사람으로서 살아내야 할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 남자는 일에 지쳐 여자와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돕기 위해 몸이 불편한 이웃의 노인을 돌봐주면서 카드빚을 갚고 적금 통장을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노인이 여자를 겁탈하려는 순간 결코 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여자의 진심은 무참히 짓이겨져 버린다.
한편 남자는 자신이 벌인 일들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작별할 수밖에 없다. 늘 먼 곳으로 떠났다가 한참 만에 돌아오곤 했던 여자친구는 이제 한 장의 편지로만 남았고, 남자는 고객들의 불만족 평가에 경위서를 쓰면서도 배차 간격이 40분이나 되는 직행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만 한다. 결국 회사 기밀과 고객정보를 경쟁사에 팔아넘기려던 남자는 사장에게 덜미가 잡혀 직장에서 퇴출당하고, 자신의 한 번뿐인 인생을 찾아 나선다.

신화의 무한함을 입은 현실의 인물들

하지만 연극이 되어 관객을 만날 <곰의 아내>는 희곡 텍스트의 신비로움을 무대만의 역동성으로 끌어안는다. 고선웅 연출이 각색한 대본은 곰의 아내를 지금의 삶에 발붙인 인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냈으며, 이에 따라 원작의 상황 설정은 미묘하게 그 결을 달리하게 되었고 극적인 갈등도 한층 선명해졌다. 원작 희곡이 논리보다는 열린 의미와 원형 희구의 맥락에서 신화의 세계에 좀 더 가깝게 닿아 있다면, 연극 <곰의 아내>는 그야말로 ‘짐승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하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전경화한다.
무대는 잿빛의 동굴이 되어 야생의 안락하고 편안한 보금자리를 나타내는 듯하면서도 출구 없는 현실의 회색빛 삶을 담아내고, 영상은 울창한 숲의 세계를 들춰낸다. 그러면서도 극은 노래와 음악을 효과적으로 운용해 곰의 아내와 남자가 맞닥뜨리는 모든 국면들에 긴장감을 더한다. 고선웅 연출 특유의 재치가 살아있으면서도 여러 인물 군상들의 서로 다른 생명력이 만나고 부딪치는 것 또한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욕망에 눈이 먼 자도, 돈에 기생하는 인간도, 심지어는 그저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조차도 각자의 이유로 살아 숨 쉬고 생을 이어가는 게 인간의 세상이다.

이미 집밖이 정글이고 생활이 아닌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할 자 누구인가. 곰의 아내는 당연히 곰이어야 하고, 따라서 우리는 그를 일컬어 곰의 아내라 부를 이유가 없다. 연극 <곰의 아내>는 바로 그 당연한 것을 질문한다. 극의 마지막, 무대에는 정말로 곰이 등장한다. 그리고 “곰이 나타났다! 사라졌던 곰이 나타났다!”라는 마지막 말만을 남긴 채 극장은 어둠에 잠길 것이다. 그렇다. 공연은 이렇게 끝이 나지만, 그 말에 뒤이어 일어날 일들을 새로 쓰는 것은 응당 이 시대의 관객들이 되어야 한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일시
7월 1일~17일 평일 8시, 주말 4시(월 공연 없음)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작
고연옥
각색·연출
고선웅
출연
김호정, 안성헌, 최용민, 유병훈, 김명기, 김성현, 손고명, 강득종, 이지현
문의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