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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마스터클래스: 가보 톰파 <보이체크>

연출의 ‘콘셉트’, 그것의 무대화

이은진_극단 바바서커스 대표
101호 2016.10.06
작년 국립극단 마스터 클래스-가보 톰파 <햄릿> 연출가 워크숍-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나는 본 워크숍이 연출가의 언어, 콘셉트, 즉 공연의 개념화 작업에 대한 안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콘셉트란 무엇인가. 좀 더 세분화하면, 콘셉트란 어디에서부터 찾아지는 것인가. 작품의 그릇/형식/스타일은 어디에 근거를...

작품을 관통하는 ‘연출의 콘셉트’란 무엇이며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

작년 국립극단 마스터 클래스-가보 톰파 <햄릿> 연출가 워크숍-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나는 본 워크숍이 연출가의 언어, 콘셉트, 즉 공연의 개념화 작업에 대한 안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콘셉트란 무엇인가. 좀 더 세분화하면, 콘셉트란 어디에서부터 찾아지는 것인가. 작품의 그릇/형식/스타일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어떤 과정으로 찾아져야 연출의 그림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작품 자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이것이 이번 워크숍에 참여하는 나의 연출로서의 질문이었다. 많이 읽었고, 여러 버전의 <보이체크>를 보았으나, 이 함축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고전 희곡이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신진연출가로서 지녀야 할 도전 정신. 같은 것 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루마니아의 거장 가보 톰파가 <보이체크>라는 작품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였다.

워크숍은 8월 26일부터 9월 5일까지 열흘의 기간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었다. 국립극단 시즌 단원 12인의 배우들과 신진 연출가 5인(극단 창세 신동일, 극단 아어 윤성호, 극단 신세계 김수정, 극단 907 설유진, 극단 바바서커스 이은진), 그리고 진행을 돕는 국립극단 PD와 조연출, 통역이 함께하였다. 작품을 둘러싼 가보 연출님의 개괄적인 설명이 주가 된 첫날에 이어 나머지 워크숍은 신체 훈련으로 시작하여 구체적인 장면 만들기, 마지막 30분 정도의 연출가 미팅으로 일과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날, 가보를 포함한 모든 연출가의 장면을 발표하는 것으로 전체 워크숍은 마무리되었다.

워크숍 첫날, 가보 연출님은 ‘콘셉트’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함께 연출의 다양한 상상력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열린 작품으로서의 <보이체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기존의 서사 구조를 깨는 분절화 된 장면들로 구성된 <보이체크>는 인물의 심리를 기반으로 하는 리얼리즘 극이나 구체적인 이미지가 텍스트 안에 이미 제시된(닫힌 연극) 부조리극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연출의 콘셉트에 따라 각 장면/사건을 다르게 배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보이체크가 마리를 살해한다’는 “살인”이 <보이체크>의 주요 사건이지만, 이 작품에서의 살인은 <오셀로>에서 질투에 눈이 멀어 데스데모나를 살해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보이체크의 살인 행위는 오히려 그를 둘러싼 환경에 의해 살인자로 내몰아지는 것으로, 각각의 작은 사건들이 모여서 발생하는 결과로서의 ‘살인’을 보여주는 것이 작품 전체의 콘셉트를 엿볼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가보의 콘셉트는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군대’를 이 사회의 축소판으로 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상명하복, 명령에 의해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군대는 마치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부조리한 세계, 매일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인간에 대한 은유로 읽혔다고 하였다. 독재 정권하에서 개인의 개성을 무시당한 채 세뇌당하는 인간, 부조리한 시스템에 희생당하는 인간으로서의 보이체크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해서 ‘senseless activity(무의미한 행위)’, 이것이 이 작품에 대한 가보의 주된 이미지이자 각 장면을 관통하는 콘셉트였다.

실제로 가보가 선보인 4개의 장면에서 이 콘셉트는 다른 행위들로 변주되며 그 의미를 확장해나갔다. 예를 들어, 안드레스와 보이체크의 풀밭 씬은 거리를 두고 선 두 인물이 양동이의 물을 서로에게 옮기는 액션으로 대체되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규칙적인 군대의 행진하는 듯한 발자국 소리 속에서, 두 인물은 물을 비우고 채우는 무의미한 행동을 끊임없이(배우가 지칠 때까지, 그리고 관객이 보기에도 너무 지루하다 싶을 만큼) 반복한다. 이것은 보이체크가 세계가 종말하는 비전을 보는 대사로 이어진다. 이 장면의 마지막 군대의 나팔 소리는 보이체크와 안드레스를 뛰게 만드는데, 이때 다른 코러스들이 하나둘씩 합류하며 무대의 앞뒤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모습으로 확장된다. 이는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 속에 갇힌 인간들의 몸부림을 연상시켜 주었다.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은, 마리가 성경구절을 읊는 장면에도 적용되었다. 가보는 보이체크와 마리의 아이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배 속의 아이로 해석하였는데, 성경구절을 읊는 장면에서 죄책감에 젖은 마리가 뜨거운 물이 담긴 양동이 위에서 자신의 배를 계속 밀어내는 행위를 하면서 낙태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것으로 장면을 풀었다.

장면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각 인물에 대한 해석도 중요하였다. 시스템에 의한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이라는 콘셉트 아래, 각 인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연출의 해석은 장면을 풀어가는 절대적인 열쇠였다. 가보가 해석하는 보이체크는 광인(狂人)과 시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는 예민한 의식을 가졌지만(시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하는 불안한 인간(광인). 시스템에 희생당하는 인간이라는 틀에서 봤을 때 마리는 여자 보이체크일 수 있으며, 완두콩 실험으로 보이체크를 서서히 죽이는(인간성을 말살하는) 의사는 이 시스템의 우두머리 쪽에 속하는 사람일 수 있다고 하였다. 가보의 인물에 대한 해석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흔히 바보나 천치로 번역되는 ‘칼’에 대한 해석이었다. 가보는 ‘칼’을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광대(Fool)과 같다고 보았다. 아주 적은 양의 대사가 부여된 인물이지만, 그 대사 속에는 뼈가 있다고 본 것이다. 칼은 시스템에 희생당하여 천치로 전락했지만, 예민한 감각은 살아있는, 어쩌면 보이체크의 거울 같은 인물로 볼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안드레스와 보이체크의 풀밭 씬 끝에 삽입되었다. 소매가 긴 정신병자의 옷을 입은 칼이 앞뒤로 달리는 군중들 틈에 춤추듯 들어와 지쳐 쓰러진 보이체크를 아이처럼 안고 달래준다. 그리고 그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관객을 향해 다가와 어느 순간 자신의 긴 소매를 발견하고 그것을 날개처럼 아래위로 휘젓는다. 그러나 이 날개짓으로 그는 날아오를 수 없다. 칼은 다시 군인의 행진 같은 발걸음을 흉내 내며 사라진다.. 이 삽입 장면은 가보가 제시한 콘셉트,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을 다른 버전의 행동을 통해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시적으로 형상화시킨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크숍에 참여한 각 연출가에겐 자신의 콘셉트로 하나에서 두 개의 장면을 만드는 과제가 주어졌다. 짧은 기간 안에 작품을 관통하는 콘셉트를, 더군다나 가보의 콘셉트를 듣고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본 이후에 찾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각 연출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고 일주일 동안 각자에게 배당된 하루 45분씩의 연습 시간을 통해 씬을 구현해내려 애썼다. 이 과정 속에서 가보는 각자의 연출들이 제시한 콘셉트가 일관된 논리로서 장면에 적용될 수 있게끔 도움을 주었다.

짧은 워크숍 기간이었지만 나는 가보의 관점을 통해 ‘연출가의 콘셉트’가 무엇인지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콘셉트’는 어떤 혁신적인, 연출의 머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고전 희곡을 베이스로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희곡의 내적인 요소들,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연출가의 관점이 정리되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 모르겠지만, 작품의 내용과 그것을 무대화하는 형식은 아주 긴밀하게 상호보완적이 되어야만 한다. 형식이 내용에 매몰되어 대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위주가 되거나, 반대로 내용이 형식에 압도되어 연출의 그림으로만 머물러서는 공연으로서 부족한 것이다. 연출의 콘셉트는 논리적으로 작품 전체를 꿰뚫어 내어 참여하는 모든 사람-배우들과 스텝들-이 그것을 중심으로 일련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되어야 하고, 나아가 이는 관객들에게 비유적으로 이 세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외적으로 지난 열흘간의 기간은 신진 연출가들, 그리고 새로운 배우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즐거운 장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기에 마스터 클래스를 기획한 국립극단에 깊이 감사드린다.

[사진: (재)국립극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