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두 <내가장롱롱메롱문열었을때>
암울한 판타지, 어느새 현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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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읽었던 악몽 같은 이야기를 시간이 흘러 다시 접했을 때 문득 그 이야기가 현실에 대한 풍자로 와 닿을 때가 있다.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집중 조명된 한 개인의 모습이 알고 보면 거대한 사회 구조를 대변하는 중요한 한 조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다. 작가의 날카로운 성찰을 통해 우리는 종종 의미 없는 한 조각인 줄 알았던 ‘나’라는 존재 안에 사회의 각종 모순이 투영돼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동이향 작·연출의 연극 <내가장롱롱메롱문열었을때>도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 안에 하나씩은 갖추고 있을 장롱이라는 소재를 통해 작가는 사회로 통하는 여러 가지 문들을 열어젖힌다. 작품의 제목처럼 처음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듯 무심히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각들이 얼기설기 엮여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시킨다. 완성된 모자이크 속에는 사회 속 각종 부조리한 모습들,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인간 군상의 어두운 모습들이 이곳저곳 포진해 있다.
지난 2011년 국립극장 소극장 판에서 초연한 후 5년 만의 재공연이다. 그 사이 <해님 지고 달님 안고>, <엘렉트라 파티>, <떠도는 땅> 등의 작품 활동을 펼쳤던 작가 겸 연출가인 동이향이 다시 이 작품을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시간이 흐른 뒤 옛 이야기를 다시 들춰볼 때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야기와 현실 사이 거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5년 전에 감각적으로 포착해냈던 그림들은 이제 시간이 흐른 뒤 좀 더 시사하는 바가 큰 사실적인 이야기로 자기 모습을 선명하게 단장한 후 다시금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장롱 속 어두움을 꺼내다
“초연 때는 작품을 감각적으로, 이미지적으로 풀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설명하기 위해 노력을 하기 보다는 이 작품 속에 있는 어두움의 감각에 주로 집중했죠. 이번에는 좀 더 서사에 초점을 맞췄어요.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어떤 아주 작은 한 사람, 본인 스스로도 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한 사람에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세계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그 사람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확장시켜 보는 거죠.” -동이향 연출가
연극 <내가장롱롱메롱문열었을때>의 주요 인물은 ‘남자24’다. 남자24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최근 2년 새 23명이 잇달아 자살하는 일이 발행했다. 회사 측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직원들의 정서와 건강상태를 조사하지만 해결책을 찾는 데 실패한다. 그러던 중 ‘남자24’는 회사의 급변하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비로 좌천된다. 어느 날 경비 일을 보고 있던 ‘남자24’의 앞에 한 미친 사람이 나타나고 그는 충동적으로 그 사람을 쫓는다. 따라가던 중 결국 ‘남자24’는 서울역에 도착하게 되고 노숙자들 사이에 앉는다.
이야기 속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는 것은 다름 아닌 장롱이다. 이 장롱 문을 여는 사람은 이른바 사회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다. 장롱 문은 출근하기 싫어 누워 있던 가장에 의해, 또 무기력한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린 한 학생에 의해 열린다. 장롱 문을 연다는 행위는 곧, 자신의 어두운 내면세계에 사로잡힌다는 것에 대한 은유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장롱이라는 소재는 이 극에서 각 개인의 내밀한 어둠의 세계들을 연결시키는 도구로써 활용된다. 인물들이 꽁꽁 닫혀 있던 장롱 문을 열어젖히면서 비로소 그 안의 어두움이 관객과 공유된다. 그런데 이 어두움, 왠지 익숙하게 다가온다. 이 어두움은 평소에 감춰왔던 어두움, 잊고 있던 어두움,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던 내 안의 그 어두움이다.

어두움을 공유한다는 것
“약간 장난같이 생각했었어요. 일종의 연극적인 장치랄까요? 복제라는 개념이 들어오면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 펼쳐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사람이 저 사람, 저 사람이 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내가 누구여도 상관이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복제라는 것이 어떤 공감에 대한 기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5년 지나서 저도 나이 먹고 재공연을 하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복제라는 것이 몸도 복제가 되지만 혹시나 마음도 복제가 될 수 있다면 하는 기대감이 든 거죠. 광장이 커진 시기이기도 하니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동이향 연출가
5년 만의 재공연 준비에 한창인 연습실에서 공연의 만듦새를 대강 보고난 뒤 가장 먼저 든 느낌은 이야기가 예전보다 더욱 선명해졌다는 것이었다. 장롱 속의 기괴한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물 같았던 공연은 어느덧 이해하기 쉬운 다큐멘터리처럼 변모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대본은 초연 때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스태프들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5년 전에는 판타지물 같았다면 이번엔 그냥 지금 상황에 대한 이야기 같다고요. 한편으로는 씁쓸했죠.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바뀌었으면 이런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와 닿는지...” 연출가의 말처럼 세상이 점점 연극 속 세계와 닮아가고 있다는 점 외에도, 초연 때에 비해 무대를 대체로 비워놓은 채 배우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도록 설정한 것도 이야기를 좀 더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한 몫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연 중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남자24’의 이야기에서 인간 복제 이야기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한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연쇄자살 사건과 퇴직 위기에 놓이면서 불안이 일상화된 가장의 이야기, 아버지를 살해한 후 방안에 유기한 학생의 이야기 외에 다소 결이 다른, 의사의 인간복제 시도 이야기가 연결된다. 그런데 이런 연결 방식은 그리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극에서 다루는 인간 복제 문제는 단순히 몸의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영역까지 확장되면서 역설적이게도 공감의 실마리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의 불합리성을 인식하면서도 그저 쳇바퀴 돌 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대체 가능한 복제 인간의 후보군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인식은 극이 진행되면서 어쩌면 마음마저도 서로 복제 돼 서로 공통된 상황 인식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사진: 초록나비컴퍼니 제공]

- 일시
- 11월 24일~12월 11일 평일 8시, 주말 4시, 월 쉼
- 장소
- 선돌극장
- 작·연출
- 동이향
- 출연
- 김태근, 하치성, 이소희, 김석기, 임윤진, 하동국
- 문의
- 010-2069-7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