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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하땅세 <위대한 놀이>

생존을 위한 규칙, 그것은 허구의 세계

김슬기_공연저술가
105호 2016.12.01
헝가리 태생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글쓰기를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2차 대전의 참상을 폭로한다. 물론 그것은 비단 전쟁 그 자체의 비참한 상황을 그려내는 것을 넘어, 전쟁이 자신에게 미쳤던 영향을 글로써 고스란히 드러내고 증언하는 수행에 가깝다. 글쓰기의 양식이나 문체,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그들의 행위, 그리고 수십 개의 ...

헝가리 태생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글쓰기를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2차 대전의 참상을 폭로한다. 물론 그것은 비단 전쟁 그 자체의 비참한 상황을 그려내는 것을 넘어, 전쟁이 자신에게 미쳤던 영향을 글로써 고스란히 드러내고 증언하는 수행에 가깝다. 글쓰기의 양식이나 문체,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그들의 행위, 그리고 수십 개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글의 제목 하나하나까지, 그의 소설은 완전한 한 몸의 유기체로서 그것이 전쟁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바로 그 소설의 강렬함이 지금 여기의 극장에서 ‘연극’이라는 옷을 입는다는 소식에 극단 하땅세의 연습실을 찾았다. 작가의 소설이 글쓰기의 기법으로 그것 안에 자신만의 세상을 담아냈다면, 이 연극은 오롯이 무대 만들기의 방식들을 활용해 또 다른 세상에 접근해간다.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극장 곳곳에서 동원되었던 온갖 것들이, 보다 그럴듯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되도록 무대 뒤로 그 몸을 숨겨왔던 모든 것들이, 이제 관객들의 눈앞에 나타나 위대한 ‘놀이’를 시작하려 한다.

소설의 글쓰기, 그 너머의 상상력

한국에서 출판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크게는 1부 「비밀노트(The Notebook, 1986)」, 2부 「타인의 증거(The Proof, 1988)」, 3부 「50년간의 고독(The Third Lie, 1991)」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차 대전의 한복판에서부터 사회주의 체제를 거쳐 그것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체제, 이념, 정체성의 문제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1999년 칠레 극단 꼼빠냐 떼아뜨로 시네마는 이 소설의 1부를 <헤멜로스(Gemelos:쌍둥이들)>라는 제목으로 무대화했고(이 공연은 2007년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를 통해 한국에 소개된 바 있다), 2013년에는 부다페스트 감독 야노스 자즈가 이 소설을 <커다란 노트>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연극 <위대한 놀이>가 그 재료로 삼은 것 역시 1부 「비밀노트」로, 2부와 3부 및 소설의 전체 주제와 연루된 1부의 독특한 글쓰기 전략은 원작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실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게 한다.
이야기는 전쟁 중 폭격을 피해 어느 국경 지대 외딴 마을에 위치한 할머니 집을 찾아온 쌍둥이들이 가져온 값나가는 것들을 모조리 팔아치웠고, 일하지 않으면 굶기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집 근처 숲에는 군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이웃에는 구걸과 도둑질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된 아이들은 스스로 학습하고 훈련하기를 택하게 된다. 여기서 진정 흥미로운 것은, 쌍둥이들이 매일매일 기록하는 그들의 일상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글로 쓰면서도 가치판단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말이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있는 그대로의 사건만을 이야기하는 데 집중한다. 이를테면 “그는 친절하다”라는 말 대신 “그는 우리에게 이불을 주었다”라고 쓰는 식이다. 따라서 온전히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현실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극도로 차갑고 건조한 기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극의 언어, 그 약속이 가리키는 것들

소설에 완전히 반했던 것 같다. 작가의 탁월한 글 솜씨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실제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이 느껴졌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우리는 우리가 감각하고 경험한 것들을 어떻게 연극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무대로서 보여주고 싶었다. 작가에게 글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무대가 있으니 그 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써보려고 한다. 소설 속에서는 아이들이 글을 쓰지만, 무대 위의 쌍둥이들에게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윤시중 연출은 이 작품이 ‘비밀노트’가 아닌 ‘위대한 놀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이 연극의 쌍둥이들은 전쟁 통의 끔찍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어떻게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래의 흔한 아이들이 장난을 치듯 무언가를 흉내 내고 심화 반복하면서 일종의 연극 놀이를 통해 세상을 배워나간다. 그것이 어느 순간 광기가 되고, 혹은 있는 그대로의 쇼가 되고, 결국은 진실이 될 때까지 그저 일련의 놀이가 계속되는 것이다.
한편 완전히 텅 빈 상태에서 시작해 극이 진행되는 중에 하나 둘 연극적 기호들로 채워지는 무대 또한 이 놀이의 주요한 축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연극 그 자체의 틀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 정보이면서도 자칫 관극을 방해하는 완전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안타깝지만 여기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 약속의 원칙만을 공개하는 데 그쳐야겠다. 그러니까, 이 공연은 연극 무대를 구성하는 빛, 소리, 공간 등이 비롯되는 원천 혹은 원리를 작정하고 드러낸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내내 극장에 있는 모든 걸 다 이용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면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껏 우리가 무대 위에 펼쳐놓았던 모든 것들 역시 하나의 만들어진 세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면 한다. 작가가 현실을 견디기 위해 가공의 글을 쓴다면, 연극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대 위에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소설을 연극으로 올리고자 하는 이유다.

무대에 딱히 기댈 것이 없으니 두드러지는 것은 자연히 배우들의 존재감이다. 특히 마녀라고 불리는 할머니 역의 배우 남미정이 보여주는 연기는, 그 치 떨리는 괴팍함과 고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연민과 애수를 불러일으키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한 단면을 포착해낸다. 마치 한 몸인 듯ㅡ이것은 단지 쌍둥이에 대한 수사적 표현을 넘어 ‘말 그대로의’ 한 몸으로 읽혀야 한다ㅡ 붙어 다니며 서로를 비추는 쌍둥이들과 소설의 다양한 인물 군상에 더불어 내레이션 및 각종 효과들을 담당하는 배우들 또한 이 연극을 ‘연극’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는 ‘위대한 놀이’의 진짜 주인공들이다.
연극의 마지막, 쌍둥이들은 끝내 알고 싶지 않았던 모종의 진실에 부닥치게 된다. 그것은 어떤 무자비한 선택에 대한 대가일 수도 있고, 변화된 시대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면 그 선택조차도, 혹은 그 통과의례마저도 현실이 키워낸 괴물의 단면이었던 것이 아닐까. 원작 소설의 결말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연극은 그에 더해 2부와 3부 모두를 아우르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추가적으로 담아낸다.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직도 한참 많지만, 현실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연극이 되었듯이, 연극은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더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오직 그것뿐이다.

[사진: 극단 하땅세 제공]

일시
12월 6~29일, 평일 8시, 토 3시 7시, 일 3시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작
아고타 크리스토프 Agota Kristof
각색
윤조병
연출
윤시중
출연
문숙경, 이수현, 서상권, 남미정, 권제인, 조선주, 임세운, 조병욱, 염용균, 안소정
문의
1600-8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