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터그42 <상처투성이 운동장>
“나 지금 좋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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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케일린이 배가 아파 학교 양호실에 누워 있다. 발소리. 지붕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떨어졌다는 더그가 얼굴에 칭칭 붕대를 감고 들어온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몸에 남은 상처는 떠들어대고 싶은 무용담이었고, 둘은 자기가 왜 아픈지, 어쩌다 다쳤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너 얼굴 찢어진 데 봐도 돼?” 더그가 붕대를 풀어 자기 상처를 보여주자 케일린이 팔을 뻗어 그 위에 손을 갖다 댄다. 붉은 피. 두 아이의 상처투성이 삶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자기 상처를 막 자랑하면서, 애써 그 상처를 들여다보고 만져보면서. 그리고 서른여덟 살이 된 지금까지 둘은 함께였다가 혼자였고, 몇 번이고 서로의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애타게 상대를 찾아 헤매길 되풀이했다. 그 사이 상처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보여주고 싶지도, 만지고 싶지도 않은 것들이 되어 버렸고,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 삼십 년의 시간이 여기 이 무대에서 까무룩, 반짝거린다. “나 지금 좋아. 괜찮아”라고 속삭이면서.

시간을 가로지르는 무대의 방식
<상처투성이 운동장>은 2009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초연된 이래 오프브로드웨이와 런던을 거쳐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라지브 조세프는 2010년 <바그다드 동물원의 뱅갈 호랑이>라는 작품으로 퓰리쳐 상을 수상한 촉망받는 작가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스스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직시하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세상을 헤쳐 나간다. 이 공연은 동시대 해외 공연들을 시간차 없이 번역해 국내 연극계에 소개하고자 하는 디렉터그42가 지난 해 낭독극으로 선보인 바 있다.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무려 삼십 년이라는 시간을,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로 교차 편집해 넘나드는 희곡의 구성은, 제한된 무대의 독특한 상상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실제로 작가는 희곡의 첫머리에, 장면 사이의 모든 전환은 배우들 스스로 느긋하게 해야 하며,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숨겨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당부의 말을 적어 놓았다. 마두영 연출은 바로 여기서부터 이 작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처음 희곡을 읽었을 때는 그 구성이 영화 같다는 인상이 강했다. 총 8개의 장에서 두 인물이 여덟 살 때부터 서른여덟 살이 될 때까지를 다루는데, 실제 시간의 흐름대로 장면을 다시 배치해보면 1·3·5·7·2·4·6·8의 순서가 된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장면을 구성했는지, 어떻게 해야 그 효과를 살릴 수 있을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지난 해 낭독공연을 할 때는 장면 설명에 해당하는 희곡의 지문을 스크린에 텍스트로 투사해서 보여줬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을 위해 이런저런 순서로 장면 연습을 해보면서, 이러한 시간 구성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환기시키면서도 관객들로 하여금 그 변화를 감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 연극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는 장치로서 음향을 들여오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지나간 기억들을 모두 뒤로 하고 비로소 고요해진 시간 앞에, 이 둘의 또 다른 미래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삶이 차이고 채여서 여기에 왔다
무대는 새하얀 벽과 바닥으로 채워진다. 장면에 따라 필요한 대도구들도 모두 하얀 색이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느낌이 거의 없을 거다.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어쩐지 블랙박스보다는 화이트큐브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분장과 의상, 소품 같은 것들은 완전한 대비를 이루도록 진짜처럼 느껴지게 하려고 한다. 매 전환마다 그 장면에 맞는 인물로 바뀌어 가는 배우들의 모습이 객석에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관객들의 상상을 자극할 수 있었으면 한다.
새하얗게 표백된 그들의 기억 속에는 그렇게 언제나 선연한 핏자국이 낭자했다. 더그는 몇 년 만에 만난 케일린에게 푹 꺼진 한 쪽 눈을 만져보라고 말한다. 케일린이 상처를 만져주면 언제나 아픈 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둘은 징그럽고 흉한 것을 공유하면서 옆에 있었다. 서로 토해놓은 것이 몽땅 섞이는 걸 같이 보고, 스스로를 해하는 걸 그저 내버려둘 수만은 없어 자기도 똑같이 베라고 다리를 내어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살아내야 할 각자의 삶이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 또한 자기 몫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희곡에는 쓰여 있지 않은 두 인물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재회에 대해서 배우들과 많은 얘기를 했다. 더그에게는 케일린이 자기를 낫게 한다는 믿음이 있고 케일린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불구가 된 더그를 보고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작 더그는 이제 와서 케일린에게 자기 상처를 만지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그 희망 안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언제까지나 서로를 기대어 살아갈 것이라 믿고 싶다.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있고, 그러다가도 삶을 부둥켜야 할 순간들이 있다. 내 삶이 감당이 안 돼 미처 당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할 때가 있고, 혹은 그럭저럭 괜찮아지고 보니 아끼던 것들은 이미 자취도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시간들을 몇 번이고 살아낸 아이들이 이제 진짜 어른이 되어 새하얀 얼음판 위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 이 두 사람은 지금 그 어디쯤에 있을까. 둘은 그 언젠가 나란히 그네에 앉아 새벽이 오도록 서로에게 귀 기울였던 운동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어쩌면 우리에게 지금, 다른 새벽이 오고 있을지 모른다.
[사진: Play For Life 제공]

- 일시
- 12월 15~31일 평일 8시, 주말 4시, 화 공연 없음
- 장소
- 대학로 나온시어터
- 작
- 라지브 조세프
- 연출
- 마두영
- 출연
- 조아라, 백종승
- 문의
- 010-2069-7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