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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NT Live <제인 에어>

"It's a girl"

김지현
113호 2017.04.06
연극 <제인 에어>는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연이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따른다. 한 생명의 탄생이건만 뭔가 쓸쓸하고 처연하다. 한 생명의 탄생에 이어 곧 한 생명의 죽음이 이어지고 삶과 죽음은 제인의 삶에 지문을 남긴다. 삶과 죽음을 일찍 깨우친 조숙한 아이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외면 받고 소외될 뿐이다. 그녀를 돌보는 유모가 ...

연극 <제인 에어>는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연이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따른다. 한 생명의 탄생이건만 뭔가 쓸쓸하고 처연하다. 한 생명의 탄생에 이어 곧 한 생명의 죽음이 이어지고 삶과 죽음은 제인의 삶에 지문을 남긴다. 삶과 죽음을 일찍 깨우친 조숙한 아이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외면 받고 소외될 뿐이다. 그녀를 돌보는 유모가 있지만 유모 역시 그녀 내면의 고통과 철저한 외로움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한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슬픔과 자책감은 어느덧 어린 소녀를 좀 먹고 이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사랑받지 못하는, 못생긴, 보잘 것 없는, 가진 것 없는’ 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와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NT Live <제인 에어> 무대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현대적이라는 것이었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저택을 기대했으나 무대는 첫 인상에 조금은 허전하다고 느낄 정도로 소박하다. 무대는 특별한 소품 없이 심플한 나무 구조물로 꾸며졌다. 나무 구조물 옆으로 설치된 여러 개의 사다리를 통해 배우들은 위와 아래를, 무대 앞과 뒤를 오고가며 공간을 구현해낸다. 이런 심플한 무대 디자인은 재기 넘치는 연출을 만나 감각적이고 풍성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나무 구조물은 때로는 제인의 유년기 학대의 경험이 집약된 붉은 방으로, 간신히 정을 붙인 친구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는 제인의 학교로, 말에서 떨어져 곤경에 처한 로체스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야외 장면으로 분한다.

배우들은 부지런히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종횡무진 나무 구조물의 위, 아래를 누빈다. 자칫하면 산만해보일 수도 있는 복잡한 동선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강렬한 존재감으로 작품의 중심추 역할을 한다.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와 집중력은 관객석으로도 고스란히 전염되어 관객의 집중력을 한껏 고양시킨다. 화려한 무대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작품은 세련된 연출방식을 군데 군데서 드러낸다. 배우들이 무대 중앙에 모여 함께 발을 구르며 마차를 타고 떠나는 제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장면이나 창문을 열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제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장면들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야기 전개에 맞는 조명과 제인의 심경과 상황을 대변하는 노래들 역시 라이브로 무대로 울려퍼져 작품의 단단한 토대를 이룬다.

무려 220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연극 <제인 에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2004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영국 현지에서는 총 2부로 나누어져 공연되었으나, NT Live를 위해 220분의 한 공연으로 재탄생했다. 연극 제작 초반에 대본이나 연출이 없었을 때 제작진은 오로지 <제인 에어> 원작 텍스트만을 곱씹으며 작품을 만들어나갔다고 한다. 2017년 <제인 에어>가 원작의 고유성과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작품의 말미에 다시 한 번 배우들이 외친다. '"It's a girl." 작품의 첫 시작을 알렸던 대사는 다시금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응애응애 조금은 처연한 소리로 울던 어린 아기 제인은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었고 더 이상 슬프거나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유년기를 좀먹었던 무관심과 폭언 대신 그녀의 곁에는 이제 남편이 된 로체스터가 있고, 두 사람 사이의 사랑스러운 딸이 있다. 작품 초반에 황량하게만 들렸던 문장이 이제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메아리가 되어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다시 한 번 제인 에어의 삶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사진: (c) Manuel Harlan, 국립극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