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예술센터 & 여기는 당연히, 극장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 관객과의 대화
예술이란 이름의 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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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4월 29일 오후 3시 공연 후
사회: 구자혜(<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 작가 및 연출가)
대담: 정진세(극작 및 연출가), 김태희(연극평론가), 김연재(극작가)
문학 그리고 예술이 성적 착취를 허하고 성적 착취에 대한 ‘셀프 용서’까지 허할 정도로 대단한 것인지 3년동안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나는 알지 못했다. 지난 해 #예술계_내_성폭력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학교의 강의 커리큘럼에서는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삭제되었고, 이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나와 같은 (연극의 표현을 빌리자면) ‘습작생’들 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연극의 표현을 또 빌리자면) ‘이세계’의 방관자들과는 달리 아예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오히려 꿈을 가지고 ‘이세계’에 들어서고자 하는 ‘저 세상’의 지망생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극계 내 성폭력이 어떻게 고발될지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잠잠했다. ‘이세계’를 아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고발과 매장이라는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해야만 했을 것이다. 의아했다. 시대와 문화의 최전방에 서서 첨예한 날을 세운 태세로 ‘연극은 시대의 정신’ 이라고 말하는 연극계가 시대의 윤리, 여성과 소수자 인권 앞에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면죄부를 주는 행위는 창작물 내에서의 여성과 소수자 혐오 그리고 창작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성폭력이라는 두 국면에서 이루어진다.

창작물 내에서의 여성, 소수자 혐오
부끄럽게도 많은 연극들이 이 사회의 여성, 소수자 혐오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여성 인물들은 헌신, 희생, 섹스 혹은 강간, 히스테리만으로 소비된다. 이에 대해 김태희 평론가는, 남성 주인공을 겁박하는 도구이자 감금과 강간의 대상으로 만드는 여성 인물의 무책임한 소비를 지적했다. 덧붙여 이러한 문제점을 ‘원래 그렇잖아’ 라는 관습의 논리로 덮어버림으로써 해당 작품을 비판과 논의의 장으로 불러오지 않는 연극계의 그릇된 구조와 둔감함에 문제를 제기했다. 구자혜 연출 또한 작품성과 작품 속 여성 인물의 그릇된 소비가 무관할 수 있겠느냐며,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지만 작품성이 좋은 경우에 해당 작품을 논외로 하는 관습을 비판했다. 이어서 한 관객은, 상처받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려는 작가들이 왜 유일하게 여성만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백컨대 나는 이 질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 또한 여성을 대상화하여 표현하곤 했다. 먼저 반성한다.
사실상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되 여성을 대상화한 많은 작품들이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았고 이 과정에서 보편성을 획득했다. 여성 인물의 무책임한 소비라는 비판 앞에서 창작자들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면죄 받았다. 오히려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작품의 철학적 무게를 이해하지 못하는 ‘예알못’(예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매도되었다. ‘억압의 시대에서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는 투사’이자 ‘가난하고 탄압받는 삶을 살아온 가오 있는 피해자’이고 ‘싶은’ 사람이 어찌 자신이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가해자’가 되는 꼴을 볼 수 있겠는가. 한편,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으며 불평등의 문제가 없는 작품은 ‘여성’이라는 형용이 붙음으로써 보편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여성이 보편의 영역에 있는 것을 못 참는 한국 사회 혹은 연극계에서 여성주의나 페미니즘이라는 형용은 작품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모두 ‘여성작가 풍(風)의’ 라는 평이 부정적인 내용을 포장하고 있으며 ‘여성작가 치고는’ 이라는 말 뒤에는 꽤 좋은 내용이 붙어 왔음을 알고 있다.

창작자 사이의 실제적 성폭력
성폭력의 피해자는 많지만 가해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술 먹고 집 앞에 찾아오는 선배를 웃으며 돌려보내야 했거나 껄끄러운 관계를 만드는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불쾌한 농담을 웃어 넘겨야 했던 사람들은 피해자가 되겠지만, 피해자의 이러한 미소를 받은 사람들은 결코 가해자가 되지 않는다. 가해자는 영원히 부족할 젠더 감수성 덕분에 혹은 일말의 무안함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가해임을 영원히 모르거나 모르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구자혜 연출은, 연극은 영화처럼 프로덕션이 꾸려지고 해체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시간 한솥밥을 먹으며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이때 형성되는 온정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성폭력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성폭력 중 외모 희롱에 있어서는 여성 배우 뿐 아니라 여성 연출가, 작가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여자 작가들은 못생겼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도 맥락 없는 말이어서 나더러 더 잘생겨지라는 건지 좀 못생겨지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러한 외모 희롱에 대해 극작가 정진세는 영화 <걷기왕> 콘티북에 실렸던 성평등 수칙1)을 언급하며 이를 적용하였을 때 오히려 연습실의 분위기가 경직되고 작품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떨어졌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연극은 분명 재미있어서 하는 일인데 그 재미가 인간을 존중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데에서 온 것이 아닌,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하는 데에서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며 현역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젠더 감수성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이제 지목해야 한다
김태희 평론가는 여성 창작자라고 해서 반드시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즉 이 글은 여성 창작자, 남성 창작자, 극중 여성 인물, 극중 남성 인물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글을 읽고 ‘너무 여성 중심적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거나 기분이 나빴다면 이 글은 효과적인 리트머스지가 된 것이다. 또한 ‘요새는 뭔 말을 못 하겠네’ 라는 생각을 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정말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맞다.
어쨌든 연극 최후의 식민지는 여성과 소수자이며 예술이라는 이름의 면죄부는 이곳저곳에 뿌려졌다. ‘예술가’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자기가 정한 콘셉트에 따라 그때그때 몸을 바꿔 특정 상황을 합리화 해주는 훌륭한 도구인 듯하다. 외롭고 싶을 땐 외롭게 해주고 정의롭고 싶을 땐 정의롭게 해주며 사랑하고 싶을 땐 가해하게 해준다. 내가 아는 건 이게 다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한다. 연극 <가해자 탐구> 속 피해자와 동갑인 아직 대학생에 불과한 나는 이곳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과정도 원인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가장 깊숙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이제 그 분들이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허심탄회하게 그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말해주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더 이상 불특정 다수의 가해자를 상정해 놓고 ‘우리 모두 가해자다’ 프레임을 씌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곧 아무도 가해자가 아니며 그냥 좋게 넘어가자는 것과 같다. ‘누구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누가’ 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누가’ 그랬는지 지목해야한다.
1) <성 평등 및 바람직한 연극 문화를 위한 프로덕션 생활 수칙>
1. 성희롱과 친밀감을 구분한다. 2. 자율적으로 동료들 간 존칭을 사용한다. 3. 성차별적 농담, 음담패설에 웃지 않고 정색한다. 4. 성희롱으로 인한 불쾌한 감정을 분명히 표현한다. 5. 상대방이 싫다는 표현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6. 동료의 사생활에 대한 루머를 퍼뜨리지 않는다. 7. 동료의 신체에 대한 성적인 평가나 비유를 하지 않는다. 8. 성희롱 이슈를 희화화하지 않는다. 9. 고정된 성 역할과 나이를 강조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10. 주위에 피해자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사진: 이대학보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