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아트센터 <생각은 자유>
김재엽의 여행가방, 그속에 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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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무대 양 옆으로 각종 공연 팜플렛과 포스터 등이 수북히 쌓여 있다. 일본군위안부와 같이 한국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독일어로 쓰여 있어 독해가 어려운 자료들이 더 많다. 전광판에는 독일어로 ‘Die Gedanken sind Frei’(생각은 자유)가 빛난다.

연극 <생각은 자유>는 연출가 김재엽이 가족과 함께 독일에 연구교수로 일 년간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 연극은 작가의 독일체류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코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며 부인 ‘소영’역은 본인이 직접 출연했다. 극의 흐름도 단선적이다. ‘재엽’이 독일로 가기 전과 독일에 가서 정착하는 과정, 독일에서 그가 보고 느낀 점,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그가 본 연극, 만난 사람들, 그가 현지에서 작업한 퍼포먼스 등이 실제 자료화면과 함께 펼쳐진다.
주인공 ‘재엽’은 독일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며, 한국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독일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 한국은 분단된 나라이며, 공공성을 가져야 할 국립기관에서는 예술에 대한 검열이 자행되고, 재난상황에서도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어 온 국민이 심리적 난민상태에 처한 곳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독일의 예술계는 성(性)과 인종, 출신국가에 대한 차별을 지양하고 세대와 민족, 국가 간의 대화와 화해를 모색하는, 사고와 발언의 자유가 있는 이상적인 곳으로 그려진다. 세월호가 침몰해버린 한국에서 온 ‘재엽’은 독일의 극장에서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연출가는 독일에서 관람한 공연 일부를 극중에 재현하여 그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극의 다른 한 축은 독일 내 한국인들에게 맞춰져 있다. 유학생, 파독광부와 간호사 출신 교민들, 이민 1,5세대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가는 한국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확보한다. 그들에게 한국은 애국을 내세우면서도 자국민들의 권익을 위해서는 별로 해 준 것이 없는 무능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아가고 싶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조국이다. 국내에서 난민의식을 느끼는 국민과, 국외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디아스포라들. ‘재엽’은 그들과 함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한국정치에 대한 퍼포먼스를 벌이며 또 다른 형태의 연대를 모색한다.

나열식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무대 주변을 활용하여 객석을 광장의 일부로 만들고, 관객을 퍼포먼스에 참여하게 하여 독일에서 촬영한 영상과 현재의 극장을 하나로 합치는 장면 등은 연출가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 지 확실히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재엽’은 일 년의 체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싼다. 그의 가방 안에는 그동안 보았던 연극 팜플렛이 가득하다. 그것은 마치 ‘생각은 자유’로 들어가는 입장권처럼 보인다. 그리고 연출가는 그 티켓들을 극장에 펼쳐놓고 말한다. 함께 가자고.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변한 느낌을 준다. 그들이 보고 느낀 것들이 그들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변한 모습은 어딘지 어색한 느낌을 준다. ‘재엽’의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도 전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여행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출사표다. 연출가 김재엽은 전작 ‘알리바이 연대기’, ‘여기, 사람이 있다’ 등에서 이미 역사와 현실을 동시에 관통하는 시각을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이제 긴 여행에서 돌아와 말한다.
“내가 이제부터 뭘 할 건지 들어봐. 나는 너에게 해 줄 얘기가 너무 많아.”

이 작품이 검열과 블랙리스트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그것은 여름 휴가지에서 보낸 엽서를 찬바람 부는 가을에 받아보는 것처럼 조금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행지에서 써 내려간 엽서에는 그 이상이 담겨있다. 거기에는 난민문제, 세대갈등과 과거사 문제,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문제, 극장의 예술과 광장의 예술에 관한 문제 등에 관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이 빼곡히 적혀있다. 그의 독일체류기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앞으로 계속 된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겨우 첫 번째 엽서 한 통을 받았을 뿐이다. 그의 자유로운 생각이 담긴 두 번째, 세 번째 엽서가 기다려진다.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