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골목길 <해방의 서울>
식민지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단면을 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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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1945년 8월 어느 날, 창경원 춘당지에서는 영화 촬영이 한창이다. 일본 영화사 「기무라키네마」의 야심작 ‘사쿠라는 피었는데’를 찍고 있는 사람들은 최고의 예술가라는 자부심으로 황국의 선전영화를 찍고 있는 여주인공 지화정과 그의 전 남편 장강선생, 청춘스타 양철과 아홉 살 문하생 소이다. 촬영은 순조로...
때는 바야흐로 1945년 8월 어느 날, 창경원 춘당지에서는 영화 촬영이 한창이다. 일본 영화사 「기무라키네마」의 야심작 ‘사쿠라는 피었는데’를 찍고 있는 사람들은 최고의 예술가라는 자부심으로 황국의 선전영화를 찍고 있는 여주인공 지화정과 그의 전 남편 장강선생, 청춘스타 양철과 아홉 살 문하생 소이다. 촬영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이제 일가족이 모두 연못에 빠져 죽는 마지막 한 장면만을 남겨둔 때에, 돌연 조선 최고의 여배우 지화정은 물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급기야 감독을 연못에 밀어 넣어 버린다. 감독은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일본에서 방금 돌아온 사장 기무라와 그의 아들 신고는 이 사태를 수습하고 촬영을 끝내려 하는데......, 과연 마지막 촬영의 메가폰은 누가 잡을 것인지?, 영화를 끝까지 찍을 수는 있을 것인지?

36년, 피지배자로 한 세대를 훌쩍 넘겨 살아온 조선 사람들은 이제 독립에 대한 기대보다 식민지인으로서의 삶에 더욱 익숙해진 것처럼 보인다. '에키타이 안'이 된 안익태선생은 만주환상곡을 지휘하고, 조선의 예술가들은 맛도 모르는 음료를 비싼 돈을 주고 마시며 상류층 행세를 한다. 젊은이들은 부와 명예를 쫓아 모던보이가 되려 하고, 어린 소녀들 까지 권번에 문하생으로 팔려온다.
예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 본 친일의 얼굴은 말갛고 우아하게 분칠한 모습이다. 동경과 만주국으로 진출할 꿈에 부풀어 완벽한 내선일체의 삶을 살고 있는 배우들, 어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갔지만 성공을 위해 매일 일본말을 공부하는 어린 소녀, 10년을 몸 바쳐 일했어도 신출내기 내지인 사장아들에게 속절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영화사 직원, 화려하고 풍요로운 선진문물로서 일본을 동경하고 추앙하는 그들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친일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생존을 위한 친일을 넘어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친일에 앞장서는 예술가들. 그들에게 해방 직전의 서울은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이다.
<만주전선>에서 이미 식민지의 기득권층으로 철저히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친일지식인들의 초상을 그린 바 있는 박근형의 신작 <해방의 서울>은 농익은 과일처럼 흐물거리는 식민지 서울의 단면을 예리한 칼로 잘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 중에 친일인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여타의 역사극과는 다른 감흥을 준다. 그들은 아름답고, 세련되고, 동화되었다. 비루한 과거를 덮어주는 화려한 베일로서의 친일, 그것이 예술가의 친일이다.
해방이후에도 그들은 문화예술계에 살아남아 60년대까지 문예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작가는 묻는다. 그들의 예술적 공헌을 논하기 이전에 정확히 그날, 천황의 항복선언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그 순간에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고.

감독이 없어도 기무라영화사의 촬영은 계속된다. 동경대학에서 예술을 배워 온 사장아들 신고는 조선의 대배우 장강에게 혹독하고 철저한 연기지도를 한다. 포복절도할 슬랩스틱으로 그려지는 이 장면은 지배자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친일의 민낯을 보여주고, 관객들은 박장대소 하지만 그 웃음의 뒷맛은 시큼하다. 지화정역을 맡아 가히 시대정신의 구현이라 할 만한 연기를 선보인 강지은과 한껏 힘을 뺀 장강역의 김은우가 골목길 배우들과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며 한 바탕 소동 속에 빛을 발한다.
독재의 시대에 독재자를 말하고, 전쟁의 시대에 군인을 말하고, 친일의 시대에 친일파를 말하는 것. 박근형은 이것이 예술가의 용기가 아니라 의무임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농익은 식민지의 단면에서 달고 끈적한 과즙이 흘러내린다. 8월 그날의 소나기는 그 기분 나쁜 끈적임을 씻어낼 수 있을지, 아직 '사쿠라는 피었는데'의 촬영은 끝나지 않았다.
[사진: 극단 골목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