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풍경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
기적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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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대개 기억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현재는 언제나 찰나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아주 자그마한 진실이라도 캐내려면 기억이라는 실마리를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종종 다른 데 말이다. 기억의 내용은 기억의 주체인 인간 각자의 욕망이나 상황에 따라 자주 달라지고...
인간의 삶은 대개 기억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현재는 언제나 찰나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아주 자그마한 진실이라도 캐내려면 기억이라는 실마리를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종종 다른 데 말이다. 기억의 내용은 기억의 주체인 인간 각자의 욕망이나 상황에 따라 자주 달라지고, 그리하여 때때로 사람 사이 갈등과 반목의 원인이 된다. 어쩌면 인간의 고통은 너와 나의 기억이 다름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의 1979년 작품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저마다의 기억을 바탕으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과연 서로 소통하고 나아가 진실을 포착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원제는 <Faith Healer>, 즉 믿음으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이 작품에선 ‘기적의 치료사’ 하디, 그의 연인 그레이스, 매니저 테디가 같은 시공간,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독백의 형식으로 쏟아낸다. 여러 마을을 다니며 이들 세 사람이 벌인 ‘기적의 치료 순회공연’은 모조리 가짜 약장수 공연 같은 사기극이었을까, 아니면 그 중 진짜 기적도 포함돼 있었을까.

서로 다른 기억의 조각들
“‘왜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못할까’라는 질문이 제게 항상 있었어요. 이 대본에서는 똑같은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기억이 다 달라요. 그걸 보니 ‘그렇다면 정말로 만나기가 힘들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 공연 팀에서 액팅코치를 해주시는 분(장은주)이 신경생물학자이자 신경심리학자예요. 그래서 ‘과연 기억이 어떻게 진행이 되기에 우리가 이렇게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기억은 생존의 전략’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어떤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되뇌고 이야기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아픈 기억은 미화시키기도 하고 아예 기억을 안 하기도 하면서 자기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거죠. 사실 그 점에 많이 끌렸어요.” -박정희 연출가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큰 줄기는 하디, 그레이스, 테디라는 세 인물의 독백이다. 공연은 세 사람이 예전에 같은 시공간에 머물며 겪은 일들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같은 일을 두고 인물들은 각자 조금씩 다르게 기억을 서술하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균열이 이 극의 가장 중요한 콘셉트이자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각각의 기억이 무대에서 발화된 이후 각 인물의 이데아들이 이들의 기억과 서로의 관점 차이에 대해 논평을 벌이며 극이 진행되는 식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 ‘기적의 치료사’ 팀의 이야기가 마치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비춰진다는 것이다. 관객을 끌어 모으고 그 앞에서 공연하며 마치 기적과도 같은 소통의 순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는 연극인들의 모습이 이들 세 인물의 모습과 겹쳐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도 있고, 그렇지 못한 순간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은 이 극의 연극에 대한 비유를 더욱 강화시킨다. 공연을 통해 치료된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10명, 어느 순간에는 0명이지만 막상 하디의 공연 팀은 그 어느 경우에도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는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환희와 절망, 자부심과 경멸, 성취감과 자괴감 등 서로 다른 기억의 조각들이 계속해서 나열될 뿐이다.

진정한 기적이란
“인간의 가장 진화된 상태가 이타성이라고 보고, 프랭크 하디가 마지막에 사람들의 분노 대상으로서 자기를 대속한다고 해석했어요. 인물들의 이데아가 과연 어떤 상태가 인간의 가장 진화된 모습인지, 진화가 정체된 상태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대목들이 각 인물들의 독백 장면들과 교묘하게 맞아가도록 설정했죠.” -박정희 연출가
극 중 하디가 지닌 치유능력은 진짜인지 거짓인지가 명확치 않다. 하디 스스로마저 확신하지 못하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기적이 때로는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는 하디가 계속해서 치유 활동을 이어가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디라는 인물의 매력은 하디가 치유의 기적을 베풀 때가 아니라 그렇지 못했을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디는 자신의 치유능력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하지만,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처연함과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사람들이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분노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치유 받지 못한 군중의 성난 모습을 하디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디가 간혹 일으켰던 기적이란 다름 아닌 이타성이라고 극단 풍경의 박정희 연출가는 보고 있다. 이타성이란 다시 말해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대는 오래된 교회에서 올리는 제의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꾸며질 예정인데, 이 같은 형식 자체가 하디의 최종적인 진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은 과연 진실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게 하는 이 공연은 기억의 디테일에는 오류가 있을지언정 기적을 일으키고자 했던 하디의 진심, 즉 이타성만큼은 숨기거나 왜곡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진: 극단 풍경 제공]

- 일정
- 9월 1~17일 평일 7시반, 토 4시7시반, 일 4시
- 장소
- 대학로 나온씨어터
- 작
- 브라이언 프리엘
- 재구성/연출
- 박정희
- 번역/드라마터그
- 이예은
- 출연
- 김정호, 주인영, 이기현, 김록원, 정혜선, 장은주
- 문의
- 010-3171-9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