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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고비>

균형의 중심추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

김나볏_공연칼럼니스트
126호 2017.10.26
돌이켜보면 문득 아쉬운 역사의 순간들이 있다. 그 때 다른 편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외국과 통상을 그 때 시작했더라면, 그 때 그 사람 말고 다른 누군가가 대통령이 됐었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가끔 한 번씩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한 나라의 중대한 흐름을 결정짓는 순간들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돌이켜보면 문득 아쉬운 역사의 순간들이 있다. 그 때 다른 편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외국과 통상을 그 때 시작했더라면, 그 때 그 사람 말고 다른 누군가가 대통령이 됐었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가끔 한 번씩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한 나라의 중대한 흐름을 결정짓는 순간들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특히 현재 나라 안팎의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질수록 더욱 그러하다.

요즘 들어 가장 아쉬운 한국사의 한 장면을 꼽으라면 일제강점으로부터 벗어난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가 극명하게 대립하던 해방공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최근의 정치적 갈등 상황이 다시금 1945년과 그 직후를 우리의 기억 속에서 호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지난해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마치 맞불과도 같은 양상으로 도심 곳곳에서 펼쳐졌다. 집회에 대한 가치판단을 떠나서 이들이 서로 좌우로 대립하던 모습 그 자체는 1946년 삼일절에 열렸던 좌측과 우측 집회의 재현처럼 느껴진다.

이양구 작가와 류주연 연출가는 연극 <고비>를 통해 해방 직후 당시 말끔히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됐던 매듭을 다시금 무대 위로 끄집어내 조명하고자 한다. 무엇이 그 당시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의 매듭을 그대로 방치하게 했는지, 그리고 그 매듭을 풀고자 하는 사람들이 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파고든다. 과거의 매듭을 들여다봄으로써 현재의 매듭을 풀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다. 1945년에 이어 2017년 다시 찾아온 고비를 잘 넘기기 위한 방도를 찾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연극의 목표점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역사

“균형이란 개념에서 중심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고비’라는 게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최초의 한글 고비(古碑)이고, 또 하나는 어려움을 넘어간다는 것, 그러니까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이란 것이 굉장히 큰 고비라는 거죠. 이걸 어떻게 넘어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잖아요. 요즘과 비슷하게 좌와 우가 굉장히 극명하게 드러나는 그런 양상들이 해방 직후에 있었는데요. 이 작품은 그 시기에 극소수였지만 중간적인 입장을 유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데 주목하고 있는 작품이에요.” -류주연 연출가

작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묘비인 ‘고비(古碑)’를 등장시켜 역사적 고민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고비’는 조선 중종 때 사화를 당해 유배를 떠나게 된 이문건이라는 인물이 자기 부모의 묘에 세운 것으로, 묘를 해치지 말아달라는 당부의 글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연극 <고비>에 등장하는 혜자는 사학 전공자로서 이문건이라는 인물에 대해 연구하면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청을 했던 이문건의 마음과 이데올로기라는 프레임 문제로 자신이 겪는 우여곡절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마음속의 질곡을 겪는 것은 비단 혜자뿐만이 아니다. 이 극에선 사학과 교수와 학생들, 경성지방재판소 판사, 상공부 관리 등이 모여 조선의 고대지명을 연구하다 이적단체로 몰려 각자 다른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각자의 성향과 처한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실 이들은 몇 가지 큰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쳐 오다보니 누구 하나 양심 깊은 곳으로부터 바라볼 때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점, 그리고 나름대로의 방식이지만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있는 요즘 대다수 한국인들의 심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인물들이다.

역사의 풍랑 속 내적 갈등에 주목

“대부분 인물들이 비슷해요. 이 공간에서 인물끼리 대립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고, 시대적 배경과 자기 자신의 내면 간 갈등이 이 극에선 가장 큰 갈등이 됩니다. 보통 보면 상대가 나랑 의견이 다를 경우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고 반응으로 폭발해야 하는데, 이건 다 내적 갈등이에요. 표현적으로는 다들 차분하게 있는데 이 가운데 갈등을 표현해야 하는 게 여전히 큰 숙제인 상황입니다.” -류주연 연출가

여러 인물들을 통해 작가와 연출가는 이 내적 혼란의 시기를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해나갈 수 있을지 마치 연구라도 하는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비단 이 연극은 현실인물들의 안타까운 당시 현실에 주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비슷한 갈등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겪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가 앞으로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과연 어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탐구보고서처럼 다가온다. 이 탐구보고서에 따르면 좌우 이데올로기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결국 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아주 섬세하게 중간적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목소리이자 소수의 목소리를 현대 관객에게 잘 전달하고자 공연에선 원작에는 없던 코러스가 등장할 예정이다.

이처럼 연극 <고비>는 나라의 근간을 세우는 데 아주 근본적인 부분부터 고민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집중 조명해 그릴 예정이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이라고 감히 폄하할 수 없는, 실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지식인들의 모습 말이다. 어쩌면 약간은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대본을 두고 공연팀은 고군분투중이다. 극 중 표면적으로는 큰 사건이나 갈등이 표출되진 않기 때문에 각자의 내면 갈등이 얼마나 섬세하게 그려지느냐가 이번 공연의 관람 포인트가 될 예정이다. 특히 무력감이든 실낱같은 희망이든 간에 이들이 당시 느꼈던 감정이란 게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그 당시 그 역사 현장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감정적 상태가 관객들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사진: 극단 산수유 제공]

일시
10월 26일~11월 12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 3시(화 쉼)
장소
여행자 극장
작
이양구
연출
류주연
출연
지춘성, 김석주, 신용진, 최원정, 서정식 외
문의
010-6338-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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