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얼굴도둑>
내 세상은 온통 네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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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어도 친구를 만나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때때로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무언가를 선택할 때 마지막 걸림돌이 되고야 마는 사람.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한국사회에서 특히나 그 이름은 가족인 경우가 많다.
국립극단에서 올해 선보이는 창작극 <얼굴도둑>은 일종의 가족 스릴러물이다. 극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엄마의 얼굴로 보이는 딸 유한민이 어느 날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유한민을 최고의 딸로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엄마는 도저히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엄마는 큰 충격으로 인해 자꾸만 지워져가는 기억을 붙잡고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나간다.
임빛나 작가가 쓴 이 희곡은 지난해 낭독공연을 거쳐 올해 국립극단 젊은극작가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무대에서 정식으로 관객을 만난다. 임빛나 작가는 2013년에 <시에나, 안녕 시에나>라는 작품으로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연극계에 이름을 알린 후 창작집단 빛과돌을 운영하며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지난해 젊은극작가전 첫 작품으로 소개된 윤미현 작가의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이후 또 한 번의 호평을 이끌어내는 작품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내 얼굴을 잃어버리다
전통적인 극작법을 최대한 적용하며 쓰는 데 중점을 뒀던 작품이에요. 그 전에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글을 썼었는데 거기서 탈피해보고자 했죠. 낭독공연에서 관객들이 좋아하는 걸 보며 사실 놀랐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썼더니 오히려 이야기가 객관화된 것 같아요. -임빛나 작가
누군가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한 감정적 의존도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극 <얼굴도둑>에 등장하는 딸 유한민은 누군가의 얼굴이 가끔 떠오르는 정도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의 얼굴이 엄마의 얼굴로 보이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있다. 나의 생각과 마음 자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엄마’로 대변되는 가족의 기대 혹은 가족에 대한 나의 압박감이다.
세상이 온통 엄마의 얼굴이어서 유한민은 인간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자란 한민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엄마의 얼굴로 보이자 급기야 세상을 회피하게 된다. 어느 순간 한민에게 가족은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아니라 자아와 내면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좋은 일자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을 꿈꾸는 엄마 캐릭터는 이 극이 단순한 가족 이야기를 넘어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되도록 돕는다. 극단적인 파국을 맞은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남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맞춰 살다 진실하고 내밀한 나만의 감정을 도둑맞아 버린 우리 시대 유한민들의 삶을 서늘하게 비춘다.
자아를 찾아서
누군가의 자아와 내면을 비추는 게 얼굴이라는 데 착안해 소재를 선택했습니다.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인데, 사실 이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경험과는 관련이 없어요. 그냥 우리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의 이야기에 빗대어 표현해보자고 생각했죠. 가족 간 있을 법한 관계 속에 자아와 내면의 상실이란 주제를 담았다는 점에서 친숙하게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아요. -임빛나 작가

자기 기준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삶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극은 꽤나 동시대적인 비극으로 비춰진다. 자칫 교훈적으로 흐를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임 작가는 뻔한 서사를 피하고 강력한 비유와 상징으로 극을 풀어냄으로써 관객과 무대 사이 객관적 거리를 확보해냈다. 엄마와 딸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벌어지는 이야기이지만 가족 단위를 넘어서서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것도 강력한 비유와 상징 덕분일 것이다. 극 말미에 드러나는 유한민의 죽음과 관련한 진실은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가오는데 이로 인해 극의 초점은 주변인물의 아픔보다도 한민의 비극적 삶 그 자체에 모아진다. 작가는 이 비극적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나를 돌보는 삶을 살라고 권하는 듯하다. 내가 나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얼굴을 도둑맞았다는 비유로 극의 서사가 선 굵게 진행되는 가운데 점쟁이, 형사, 한민의 전 남자친구 등이 등장해 극의 보조서사를 만들어 낸다. 캐릭터 각각의 뚜렷한 개성은 스릴러물다운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다만 이들 서브플롯의 경우 메인플롯에 비해 다소 피상적·전형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마와 딸 이야기에 워낙 큰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믿고 봄직한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된 만큼 무대화되는 과정에서 이들이 작은 이야기 단서들을 어떻게 생생하게 살려 낼지 주목된다. 신예작가 임빛나와 박정희 연출가 간 호흡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일상을 넘어서는 관념적 세계를 여러 차례 다뤄온 박 연출가가 진실한 감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비춰낼지 주목된다.
[사진: 국립극단 제공)]

- 일시
- 5월 11일~6월 3일 평일 7시반, 주말 3시, 화요일 쉼
- 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 작
- 임빛나
- 연출
- 박정희
- 출연
- 성여진, 주인영, 신안진, 황선화, 우정원, 이지혜, 이호철
- 문의
-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