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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진 작·연출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

환상일상의 일상환상

허영균_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
146호 2018.08.23
어렴풋 기억이 났다. 때는 2012년, 그해 여름도 그렇게 더웠다. 극장은 그때도 지금도 낡았다. 6년 전 여름 포스트극장에서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의 낭독공연을 봤었다, 분명. 아마도 연신 손부채질을 했을 것이다. 누구와 보았는지(혼자 봤겠지), 어쩌다 보게 됐는지(예매했겠지), 보고 난 뒤의 감상은 ...

어렴풋 기억이 났다. 때는 2012년, 그해 여름도 그렇게 더웠다. 극장은 그때도 지금도 낡았다. 6년 전 여름 포스트극장에서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의 낭독공연을 봤었다, 분명. 아마도 연신 손부채질을 했을 것이다. 누구와 보았는지(혼자 봤겠지), 어쩌다 보게 됐는지(예매했겠지), 보고 난 뒤의 감상은 어땠는지(재밌었겠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만난 공연의 제목을 통해 그리고 남겨진 자료를 통해 그때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될 뿐이다. 상상에 가까운 사실을 끼워 맞춘다. 때론 사실이 허구보다 낯설다.

8월 23일부터 9월 2일까지. 여행자극장에 오르는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가 쓰인 것은 2003년으로 낭독 공연을 거쳐 무대화되기까지 15년이 흘렀다. 작가 신안진은 약 20년가량 활약해 온 배우인데, 그의 연극 인생 초기라고 할 수 있을 때부터 이러한 작품을 구상하고 썼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오랫동안 품어온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마음도 궁금하지만, 그보다는 배우로 쌓아 올린 시간의 틈새를 메운 작가, 연출로서의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동료 배우 오대석, 김규도, 김훈만, 고애리, 민아비와 작가 겸 연출인 윤성호가 출연하는데, 배우 동료를 작, 연출가로 다시 만나는 감각 또한 흥미롭겠다.

이 작품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집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연기론과 공연미학을 담아 창작한, 허구와 실재 배역과 배우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작품’이라는 소개와 더불어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 혹은 오해하기로 한다. 더 뻔뻔하게 오해하고, 더 단단히 기대하기 위하여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에서 『픽션들』의 흔적을 뒤적인다.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는 오후부터 밤까지 짧은 시간 동안,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여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소위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없다. 현실적인 사건, 특정한 사고가 일어나지도, 사실적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 이 작품 안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거나, 모두가 주변인이다.

사건들 또한 그렇다. 철새들이 겨울을 보내는 호숫가 근처의 자전거 카페 '바이칼'에 언젠가부터 드나드는 행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투입된 비밀요원 브래들리와 니나의 에피소드, 자전거포 사장인 게리와 그의 친구 연극 연출가 찰스의 이야기, 그리고 호수 주변에서 펼쳐질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카페에 들르는 여인 루시의 하루가 나란하다. 카페의 정기휴일, 우연인 듯 필연인 듯, 한 날 한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불꽃놀이를 기다리며 각자의 시간을 걷고 있는 것이다.

『픽션들』이 몽타주처럼 얽힌 단편의 조합을 통해, 소설의 시점을 다양화하는 효과를 취했듯이, 사건들을 동시에 진행시키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개괄적으로 작품을 조망하도록 한다. 보르헤스는 『픽션들』의 서문에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 나간 짓”이라 적었는데,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 역시 짧은 에피소드가 교차하며, 관객이 통과해야 하는 지난한 지켜보기의 과정을 축약해준다. 그 축약은 신기하게도, 이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생각해보자. 우리의 삶이 논리로, 맥락으로 무장했던가를.

『픽션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지명을 마치 사실처럼 근거를 들어 적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소설,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 작품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허구의 누적은 ‘진짜’를 들여다보게 하고, 병치되는 현실과 환상은 연극과 비연극의 경계 위에 관객을 서게 한다. 이 작품이 그러나, 계속해서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작품이 취하는 명확한 태도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픽션입니다>는 무대 위에서, 연극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작가가 소설의 여러 서사 형식을 빌려 연극이란 허구에 관해 말하는 일상극이자, 환상극이다.

[사진: 신안진 제공]

일시
8월 23일~9월 2일 평일 8시, 토4시7시, 일 4시, 월 쉼
장소
여행자극장
작/연출
신안진
출연
오대석, 김규도, 김훈만, 윤성호, 고애리, 민아비
문의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