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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불편한 연극』 제작기

창작자로서 교육콘텐츠를 만든다는 것

강한나_극작가
164호 2019.07.25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하고 싶은,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억창고에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소장하기 위해 시간순으로 복기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역사학에서는 이렇게 연대기적으로 과거의 사실을 추적해나가는 방식을 편년체라고 한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하고 싶은,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억창고에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소장하기 위해 시간순으로 복기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역사학에서는 이렇게 연대기적으로 과거의 사실을 추적해나가는 방식을 편년체라고 한다.)
지난 7월 10일에 있었던 <연극인을 위한 성평등교육 DIY 포럼>(주최: 페미씨어터/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후원: 서울시 성평등기금)에서, 공연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불편한 연극>의 제작 과정을 공유하는 발제를 할 기회가 있었다. 발제 준비를 하면서, 이 보라색 칼라 컨셉의 실물 책자가 나오기까지의 히스토리를 시간순으로 곱씹으며 복기해보았다. 처음 이 교육콘텐츠 제작이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하 성반연)에 제안된 것은 작년 5월 중순이었다. 시기적인 배경을 생각해본다면, 연극계의 용기 있는 피해생존자들과 지지자들이 ‘#미투’를 표명하며 발화의 에너지로 침묵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그간 그 ‘침묵’으로 유지되어왔던 폭력의 구조를 직시하며 현자타임을 충분히 가졌던 시점이었다. 뭔가 잘못되었고, 불편하고, 그렇기에 바뀌어야 하고 개선되어야 한다는 감각이 누군가에게는 생겼다. 그런데, 무엇이 왜 잘못된 것이지? 이 막연하고 직관적인 불편함의 근거는 무엇이지? 이해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기실 이 ‘쉽지 않다’는 말은 우리가 현장 당사자이기에 비교적 너그럽게 허락된 토로였다. 관에서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다. 최대한 신속하게, 하지만 졸속은 아니게 이 폭력의 구조를 ‘시정’해야 했다. 관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착수해야 했던 작업은 물론 예방교육이었다. 성반연에 교육콘텐츠 제작을 제안했던 주체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하 양평원)이었는데, 문화예술계에서 활용될 수 있는 성평등교육 혹은 폭력예방교육 콘텐츠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기관 중 하나였고, 여타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현장예술인들과의 커넥션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성반연은 이렇게 곤란을 느끼는 기관들이 발품을 팔 때에 가장 먼저 찾는 네트워크가 되었다. 양평원의 제안대로 연극인들을 위한 맞춤형 교육콘텐츠 제작의 필요성에는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역시나 ‘쉽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당시의 성반연은(적어도 나는) 무엇이 왜 잘못된 것이며, 이 막연하고 직관적인 불편함의 근거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던 레벨이었다. 그렇기에 교육의 대상자를 누구로 상정할 것이며, 교육의 내용(what)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 것이며, 등등 초반 방향을 잡아나가는 데만도 엄청 헤맸던 기억이 난다. 이 과정이 더뎠던 건 성반연의 수평적인 대화와 논의 및 의사결정 구조가 한 몫하기도 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답이 안 나올 땐 공부부터! 해보는 성반연 레퍼토리의 시작이었다.
리서치를 위해 6월 한 달 동안 성반연의 공개 오프라인 모임인 월요모임에서 4회에 걸친 사례수집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례들을 쏟아내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새삼 느낀 것은, 우리가 아직 ‘폭력’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왜 그것이 ‘폭력’인지,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 아주 많이 헷갈려한다는 거였다. 이런 입장에서 이 교육콘텐츠의 서술방식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선언문 혹은 권리장전 형태의 문서도, 어떤 규약의 형태도 실은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낯설고, 익숙지 않고, 너무도 잘 모르겠는 작업이었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우리가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해나갈 수 있는 접근이 필요했다.
이 타이밍에 모 연출로부터 전구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제안되며 이 정체된 상황을 일망타진하게 되는데, 교육자료에 희곡의 형식을 차용하자는 발상이었다. 별안간 테이블에 창의의 스파크가 붙어 너도나도 의견을 이어 붙였다. 연극을 만들 때 장면 구성의 기본 바탕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등장인물일 테다. 연극이라는 것이 제작되고, 그것이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되고, 그 경험이 공유되는 전 과정(시간). 연극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무대, 극장, 분장실, 연습실, 학교, 강의실, 회의 테이블, 술자리 등의 공간. 극작, 기획, 연출부, 배우, 조명, 무대, 음향, 안무, 관객, 평론, 예술교육기관의 학생들까지 각자 위치에서 연극을 하는 작업자들. 이렇게 다양한 차원과 케이스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장면들에 우리가 수집했던 사례들을 대입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평상시 공연을 만들 때 작업하는 대본에 메모나 노트를 하는 것처럼, 장면 안에서 불편하거나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지점들, 혹은 시사점들을 빨간펜으로 필기하듯이 노트하고 현장 연극인으로서 나름대로 그것을 해석해보는 컨셉까지 기획의 발상이 뻗어 나갔다. 이것을 진행하기 위해, 배우, 연출, 작가, 기획 등 비교적 다양한 포지션의 인원으로 6명의 집필진(a.k.a. ‘소책자팀’)이 구성되었고, 7월과 8월은 그렇게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극화된 장면들의 초고를 써보는 단계를 거쳤다.
처음 이러한 접근방식과 프로세스를 선택할 때는 무척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희곡의 문법으로 어떠한 장면을 묘사한다는 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었기에, 게다가 이미 장면의 기반이 되는 사례들이 있으니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작의 부담은 덜어진 것이기에, 작업해나갈 프로세스가 막연하거나 막막한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장면을 써보니, 창작자로서 자신의 창작물을 창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딜레마를 만나게 되었다. 먼저, 평소 창작을 할 때 각자에게 기본적으로 배어있는 극작술(혹은 소위 말하는 ‘쪼’)이 교육콘텐츠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지점들을 발견했다. 실제 사례들에 극성을 입히기 위해 폭력의 상황을 유형화하고, 이것을 극화할 때에, 필연적으로 연극적 과장이 발생하거나, 캐릭터가 희화화되거나, 특정 캐릭터나 대사, 상황이 드라마적인 재미 요소로 기능하는 면이 생기게 될 수도 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장면을 수정하거나 새 장면을 쓸 때는 최대한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실제 사례를 충실히 재현하는 방향으로도 써보았는데, 이 경우는 또 다른 질문이 우리를 붙들었다. 아무리 예방교육의 목적일지언정 어찌 되었건 피해사례와 폭력이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고 우리가 그것을 충분한 고민 없이 또 다른 형태로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제로 소책자팀은 7-8월 두 달에 걸친 초고 탈고 기간 동안 매주 1회 집필회의를 하고 폭력의 장면들을 다루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내상과 스트레스, 피로를 느끼기도 했다.
많은 혼란과 질문들에 대한 답과 결론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어찌어찌 19개 장면으로 구성된 초고를 탈고하였다. 사실 두 달 동안 원고를 붙잡고 있었더니 소책자팀 안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초고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제시된 장면에 매몰되거나 어떠한 선입견을 갖지 않은 채로 객관적으로 ‘빨간펜’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성반연 실무진 안에서 소책자팀을 제외한 인원 중 상대적으로 높은 젠더감수성을 견지한 것으로 추천된 6명이 고르게 분량을 배분받아 초고의 장면들에 주석을 달았다. 이 6명의 ‘빨간펜 선생님’들은 불편한 감각을 논리정연한 언어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능력자들이었다. 처음 빨간펜 주석을 받아들었을 때 바로 느껴지는 감상은, 빨간펜 선생님들이 초고의 장면들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그 숨겨지지 않는 분노가 주석에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사이다 같은 워딩에 청량감마저 느껴졌다. 당사자인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동시에 또 고민했다. 이렇게 적나라한 ‘빡침’의 워딩이 교육의 목적에도 잘 부합할 수 있을까? 오히려 문학적이기까지 한 이 주옥같은 워딩들이 감수를 거쳐 일정부분 정제되어야 한다면? 너무 아깝다! 는 생각이 들었다.
9월 한 달은 이 ‘빨간펜’ 주석을 정리하는 기간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단계에서 ‘교육적’이라는 기준이라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또 한 번의 급(急)신상공개를 하자면 나는 교육 관련 전공자인데, 교육학 이론에서 말하는 담론들이 딱히 판단에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소책자팀 모두가 전적으로 직관에 기대어 수위조절을 하는 방식의 선택을 한 것 같은데, 이 과정에서 무작정 지레 스스로 검열하는 기제가 작동했던 건 아니었나 반추해보기도 한다. 물론 소책자팀 인원 각자의 일정 문제도 있었지만, 만약에 현장예술가들에게 교육콘텐츠 연구개발을 의뢰하는 기관이나 주체가 R&D 단계를 내실 있게 지원해줄 수 있는 여건(이를테면 인건비/실비 지원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재정적인 여건, 자문을 위한 전문가 풀과 링크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거나, R&D를 진행할 담당자들의 실행력)을 갖췄더라면 우리의 이런 고민들이 조금 더 생산적인 모습으로 해결 과정을 거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실물 책자의 최종 결과물을 보고 있으면, 그런 과정상의 고민이 있었나 싶게 도취되기도 한다. 10월부터는 편집의 단계로 넘어갔고, 초고의 19개의 장면은 교육 소책자의 분량에 맞게 폭력의 유형에 있어서 대표성을 가지는 6개의 장면으로 추려졌으며, 제목은 ‘불편한 연극(부제: 연극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불편한 장면들)’으로 결정되었다. 거기에 한국여성민우회 정책위원이신 이임혜경님의 코멘트가 삽입되었고, (주)인디엔피에서 애정과 마음을 담아 책자의 디자인을 맡아준 덕에, 진짜로 교육의 기능이 가능한 콘텐츠가 만들어졌다. 간간이 이 『불편한 연극』을 실제 예방 교육이나 워크숍에서 활용하는 프로덕션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소책자팀의 우왕좌왕이 마냥 헛고생은 아니었구나 싶다. ‘기억하고 싶은,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억창고에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소장하기 위해 시간 순으로 복기해보’려고 했으나, 솔직히 고백하면 일 년이 지나간 지금은 기억이 꽤나 아름답게 미화되어 있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적 서술에 있어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글의 도입을 ‘편년체’ 운운하며 시작했기에, 이 소책자의 제작 과정 타임라인을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타임라인
일자 내용 장소
2018 6.4 열다섯 번째 월요모임.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사례수집 1차 워크숍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용납할 수 없었던 일들> 이음센터
커뮤니티룸2
6.11 열여섯 번째 월요모임.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사례수집 2차 워크숍 <예술에 있어서 재현 문화>(부제; 미학적이라는 평가로 허용되었던 장면들)
6.18 열일곱 번째 월요모임.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사례수집 3차 워크숍 <#미투의 흐름에 있어서 그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는 ’관객들’의 이야기>
6.25 열여덟 번째 월요모임.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사례수집 4차 워크숍 <미처 다 하지 못 한 이야기>
7.14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집필 & 1차 집필회의 콘텐츠문화광장
회의실
7.21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집필 & 2차 집필회의
7.28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집필 & 3차 집필회의
8.4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집필 & 4차 집필회의
8.11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집필 & 5차 집필회의. 목차구성 초안.
8.18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집필 & 6차 집필회의
8.25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초고 탈고
8.27 스물네 번째 월요모임.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초고 합평.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 ‘달개비’ 합평회 모더레이터로 초청. 헤화공유공간
코스타
9.15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기획회의 -
10.26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원고수정 회의
11.8 연극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젠더감수성/인권감수성 교육 소책자 기획회의. 책자 제목 ‘불편한 연극’으로 확정.
11.19 『불편한 연극』 완고 탈고
12.27 『불편한 연극』 초판 1쇄
2019 1.22 『불편한 연극』 발간사 (성반연 페이스북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