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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연극제X서울변방연극제 공동포럼 <연극을 퀴어링!>

우리는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강윤지_연출가
164호 2019.07.25
‘퀴어’라는 단어는 단순명료하게 동성애자만을 일컫거나 성정체성과 지향성만을 함의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연극제와 서울변방연극제의 공동포럼이라는 정체성은 ‘연극을 퀴어링’한다는 범주를 보다 확장하고 문화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는 다양성에 대하여 고찰하게끔 만든다. 연극을 퀴어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퀴어란 규범화하거나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며 보편성을 ...
‘퀴어’라는 단어는 단순명료하게 동성애자만을 일컫거나 성정체성과 지향성만을 함의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연극제와 서울변방연극제의 공동포럼이라는 정체성은 ‘연극을 퀴어링’한다는 범주를 보다 확장하고 문화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는 다양성에 대하여 고찰하게끔 만든다. 연극을 퀴어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퀴어란 규범화하거나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며 보편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획일화할 수 없는 무한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동적인 탄력성이 ‘페미니즘연극제’와 ‘변방연극제’, 그리고 ‘퀴어’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일 것이다. 이러한 범주를 가시화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퀴어연극’과 관련된 퀴어한 발제들이 시작되었다. 지난 7월 8일 포럼이 진행된 서울연극센터 아카데미룸에 들어서자마자 피피티 한 장이 띄워져 있다. <포럼장에서 지켜야 할 일>이라는 간단명료한 주의사항인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었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각자의 정체성을 구분 짓는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퀴어는 아니지만..)’

본 문구를 통해 포럼(공간)은 젠더이분법적인 사회(여성/남성, 이성애/동성애)에서 벗어나 있음에 대하여 참석자들에게 먼저 이야기한다. 위의 문장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불편한 발언이다. 이는 ‘퀴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낯선 것임을 입증하며, 발언자가 ‘퀴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사회에 반하거나 일반을 벗어나지 않음을 설명하는 방어적인 기제로 사용된다. 퀴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발언자는 퀴어일 이유도 퀴어가 아닐 이유도 없다.
1부의 첫 번째 패널이었던 ‘퀴어연극제’는 횟수로 4년이지만 그 역사는 깊다. 2000년대 중반부터 '맥놀이'라는 극단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퀴어는 연극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극의 일부분으로, 특별한 지향성을 가진 존재로, 혹은 브로맨스를 그리는 인물들로 등장해왔다. 그러나 퀴어연극제처럼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퀴어성에 대하여 탐구하고 실현해왔던 연극제는 없었다. 자발성과 독립성을 추구하는 본 연극제는 다양한 연대체들의 협력과 도움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지만, 한 번도 공공지원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실제로 이들은 재정적 안전성보다 개방성과 자율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함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본 연극제의 특별한 점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 또한 존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엇도 규정하지 않으려는 점에서 퀴어하다. 축제를 운영하거나, 문제들이 발생할 때 어떤 규약(혹은 제한)을 시급히 마련함으로써 해결방안을 모색해왔던 익숙한 풍경들과는 사뭇 다르다. 퀴어연극제에서는 ‘우리들의 약속’이라는 서로를 존중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 외에는 앞으로도 규약을 마련할 예정이 없다고 한다.
두 번째 패널이었던 오수환 작가(丙 소사이어티)는 <신토불이 진품명품>이 왜 퀴어한 연극인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등장하거나 게이, 레즈비언이 나온다고 해서 퀴어연극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하다며, 이것을 어떻게 다뤄낼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토불이 진품명품>의 공연 소개문은 오수환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끔찍할 정도로 분열적인 연극소개문’이며 ‘가독성이 제로’이다. 기존의 관습을 빌리지 않은, 통용될 수도 있으나 통용되기 어려운, 분열처럼 보이지만 분열이 아닌 글귀들. 이보다 창작진의 의도를 더 잘 설명해낼 수 있는 퀴어한 홍보물이 있을까.
이쯤 되니 슬슬 의문이 생긴다. 서문에 나열해 두었던 ‘퀴어’의 확장된 범주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퀴어인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축제와 공연에 대한 소개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연극을 퀴어링한다는 것은, 퀴어가 등장하는 공연이 많아져야 한다는 뜻일까. 세 번째 패널인 이리 배우(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또한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라는 작품에 관해 설명한다. 마흔을 넘긴, 비혼, 페미니스트, 퀴어, 여성, 연극인, 배우 등 다양한 범주가 담겨 있는 공연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한다.

“퀴어인 연극인으로 연극계에서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퀴어로서 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

그제야 필자는 본 포럼을 미약하게나마 이해한다. 사실 ‘연극을 퀴어링’한다는 문구는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예를 들어 ‘차별과 혐오 없는’ 연극, ‘다양한 성정체성과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나오는’ 연극이란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연극’이라는 일반적 범주에 모든 다양성이 통용될 수 있기 위하여, ‘페미니즘’연극과 ‘퀴어’연극이라 명명해야 하는 일이 없어지기 위하여, 존재 자체를 바라보기 위하여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2부에서는 연출가 겸 배우인 제레미 나이덱과 박영희(극단 잼박스) 연출의 공연 <우리 지하에서 만나요(We’ll meet you underground)>의 사례를 소개한다. 본 공연은 단순히 ‘공연’이라 칭할 수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것을 설명한 언어가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창조해낸 것은 ‘공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퀴어와 비-퀴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젠더화되어 있는 공간 속에서 퀴어는 자신을 숨겨야 한다거나 아웃팅을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공간을 재구성했을 때 신체는 재구성될 수 있다. 다층적이고 겹겹이 쌓인 모호한 어떤 공간에서 수많은 타인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 지하에 창조해낸 그들의 공간은, 진정한 유토피아처럼 들렸다. 퀴어가 등장하는 것 이상으로 퀴어한 연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연극을 퀴어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퀴어연극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퀴어가 등장하면,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퀴어연극인가 혹은 퀴어한 연극인가. 퀴어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가. 연극계 내의 젠더이분법적이고 성차별적인, 호모포빅한 연극들이 모두 사라지고 먼 훗날 ‘참 이상한 포럼도 있었다’라고 회자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연극제 X 서울변방연극제 공동포럼] 연극을 퀴어링!
관련정보: https://web.facebook.com/femiplay/posts/2843671385708240
[사진제공: 제2회 페미니즘연극제ⓒ박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