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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면

강화유니버스 <잠시섬 연극제>

염문경

209호

2021.11.11

난 사람을 만나는 게 싫다. 아, 너무 사회 부적응자 같으니 정정하자. 새롭거나 낯설거나 너무 오랜만인 사람을 만나는 게 싫다. 사람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단지, 그 자리를 즐기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들여버리는 것이 내 오랜 습관이기 때문이다.

전윤환 연출가로부터 잠시섬 연극제에 오라는 초대를 받았을 때 응했던 건 그러니까, 강화도였기 때문이다. 섬에 가는 일. 일주일간 머무르는 일. 육지에 나가려도 나갈 수 없는 일. 나는 사실 그걸 원했다. 서울에서 강화도로, 잠수를 타고 싶었다. 아마 그런 걸 상상했던 것 같다. 볕 좋은 민박집 마당에서 차를 마시며, 아무 생각 않고 종일 책을 읽거나,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개인 작업을 완성하는 뭐 그런 은둔 예술가 같은 생활. 그런 시간 또한 분명 겪었다. 그러나 사실 대다수의 나머지 시간들은, 놀랍게도, 유럽 10박 11일 패키지 여행 뺨치도록 할 일도 만날 사람도 많았던 바쁜 여행이었음을 회고한다. 그렇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강화도로의 여행을, 혹은 ‘귀촌’을 생각하는 누군가 흔히 상상하는 ‘리틀 포레스트’. 나 역시 강화도로 가면 나무나 갯벌 정도만 만나면 될 줄 알았던 거다. 하지만 당연히도, 강화도에는 사람이, 수백 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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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차, 월요일. 주말에 공연을 올릴 각 팀의 공간을 투어했다.
잠시섬 연극제에 초대된 아티스트는 총 6팀. 매칭된 공간은 각각 스트롱파이어(강화도에서 명동 기분 내고 싶을 때 들르는 모던한 펍), 책방 시점(게스트하우스와 서점이 결합된 따뜻한 공간), 낙토(명상이 절로 되는 크리스마스 나무 숲속 독채 민박), 희와래 커피 로스터스(탁 트인 벼 뷰와 함께 비건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카페), 자람도서관(로컬 청소년 주민들의 복합 멀티 사랑방을 꿈꾸는 신기한 도서관), 그리고 차완이었다.
우리 팀과 매칭된 공간은 차완으로, 강화도 최고의 낙조 명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바다 뷰가 펼쳐진 동남아시아풍 찻집이다. 공간에 들어선 순간 확신했다. ‘뭐야, 공간이 너무 예쁘잖아. 공연 뭐 다 됐네’. 다음 순간 걱정했다. ‘아니, 공간만 있어도 충분히 좋아서 공연 따위 얹어봤자 사족일 것 같은데!’
매칭 공간 투어로 지친 밤, ‘회고’ 미팅이 있었다. 서로 다른 팀, 그리고 나와 매칭된 공간의 주인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독 및 저질체력으로 아주 피곤했기 때문에 주말 공연 여건에 대해서만 효율적으로 대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뿔싸, 차완의 사장님께서는 무한 텐션과 열정을 지닌 극강의 ENFP였고… 오랜 습관대로 낯선 상대의 텐션에 맞춰 맞장구치던 나는 얼결에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다. “내, 내일 당장 차완에서 요가&티 클래스를 하신다고요?? 와 너무 좋네요!!! 꼬, 꼭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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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차, 화요일. 늦잠 자고 싶었지만 잘 수 없었다. 동행한 팀원들과 아침 명상을 약속한 데다, 빨리 점심 먹어서 식사 쿠폰도 소진해야 하고, 또 강화도를 수직으로 횡단해(운전자는 나였다…) 차완에 가서 약속한 요가&티 클래스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다가 보이는 정원에서 야외 요가를 한 적이 있는가? 보라카이나 코타키나발루가 아닌 강화도에서, 그래 본 사람 있는가? 나는 했다(자랑). 그건 생애 첫 경험이었고, 순식간에 얼굴이 가을볕에 그을렸지만, 한순간 바람과 연결된다 느껴질 정도로 충만했다.
‘낙토’ 사장님의 요가 클래스가 끝난 후 ‘차완’ 사장님의 티 클래스가 이어졌다. 말레이시아에서 오래 여행업을 하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돌아와 찻집을 차리게 되었는데, 클래스는 처음이라며 히비스커스, 코코아, 카모마일 등 직접 블렌딩한 차의 이름들을 발음하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알았다. 나 같은 INFP인을 겁먹게 하는 무한 텐션, 극강의 ENFP 사장님 역시 실은 낯선 사람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먼저 자처해 에너지를 발산할 뿐이라는 것. 선뜻 마음을 열어 차를 내주고 시간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기에 오늘 여기 내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 나는 왜 늘 지레 마음을 아끼고 벽을 치는 걸까? 사장님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3일 차, 수요일. 요가&티 클래스에서 알게 된 로컬의 젊은 사장님들 가게에 들렀다. 그중엔 아직 대학생인 우리 팀원 혜진 씨가 강화에 오게 만든 이유인 ‘히피가게’도 있었고, 정통 영국풍 찻집 ‘캐롤티하우스’도 있었다. 강화가 이렇게 힙하고 귀여울 일인가? 신기한 인연들과 귀여운 가게에 들떠 지갑을 지켜내지 못했다.
밤에는 슬슬 잠시섬 연극제 사람들이 회의 겸 만남 겸, ‘스트롱 파이어’에 모여들었다. 연극제 주최자 전윤환 연출이 말했다. “강화에 친구들이 오니까 너무 반갑고 살 것 같아요”. 잠시섬 프로그램 주최자 강화 유니버스의 결님이 말했다. “다들 강화에 오면 펜션 잡고 낙조 보고 끝내잖아요. 강화에 이렇게 다양한 우리가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그러니 공연에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고서 우리는 한 시간 내내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울었다. 우리가 다닌 대부분의 공간에 길고양이들의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길에서 만난 개와 고양이들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마, 결님과 같은 사람들이 강화에 많이 살고 있는 덕분일 거다. 이런 섬에 친구로 초대된 거구나. 잠깐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날은 아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문득 피곤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4일 차, 목요일. 몇몇 팀이 모여 석모도 해수노천온천에 갔다. 성별도 나이도 뒤죽박죽인, 성기게 친할 뿐인 연극인들이 찜질복 차림으로 물에 잠겨 낙조를 바라보고 수영했다. 누군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릴 보면 궁금해하겠어요. 저 사람들 뭘까, 무슨 관곌까?” “글쎄요. 우리 나이대로 봐선, 무슨 기업의 임원 워크숍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누구도 못 맞출 거예요, 우리가 왜 여기 함께 있는지.”

5일 차, 금요일. 공연 준비를 위해 대본을 쓰고, 자전거를 좀 탔다. 얕은 바다 건너 지척에 북한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교동도에 가면 길을 걷는 개도 보인다고 했다. 북한은 처음 봤다.

6일 차와 7일 차, 주말. 세 팀씩 나누어 토, 일 두 차례 공연을 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모든 공연이 좋았고, 모든 공간이 좋았다. 아니, 모르겠다. 우리의 공연들이 어떤 공연이었을까? 연극제였는데 이상하게 공연을 평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구나, 이 공간의 사장님이 함께 웃고 있구나. 나는 그런 것만 보고 나왔던 것 같다.
차완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사장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평소의 나라면 그냥 돌아가서 쉬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저녁을 먹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느꼈다. 결국엔 2차로 히피가게와 캐롤티하우스까지 들러 첫날 만났던 인연들 모두와의 한밤중 티타임으로 마무리하게 됐다. 숙소에 돌아가 우리 팀원들 셋이 밤새 이야기 나누며 조금 울었다. 바보 같은 시간이었다. 마법 같은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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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섬 연극제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묘사는 이게 다다. 나머진 정말 잘 모르겠다. 긴 시간 서울에서 찾아온 관객들이 정말 좋은 공연을 보고 갔을까? 우리의 짧은 방문이 강화 유니버스 청년들에게 뭔가 도움이 됐을까?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만나고 왔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러 간 강화도에서 올해 가장 많은 사람을 진짜 만났다. 결국엔 만나는 일이었다. 섬을, 고양이들을, 오후 3시 반부터 이어지는 낮은 햇볕을, 평생 모르고 지내도 좋으리라 여겼던 타인의 삶을. 내가 만난 것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조금쯤 나를 바꾸었을 것이다.

일요일 공연에 대학 극회 후배가 찾아왔었다. 까마득히 먼 학번이라 서로 조금 어색했는데, SNS만 보고 와준 것이 고마워 열심히 말을 붙였다. 아마 졸업 후 연극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때의 나처럼. 문득 묻고 싶어졌다. ‘우리는 연극이 왜 좋을까?’ 대학 극회 시절, 나는 우리가 모여 있었기 때문에 연극을 좋아했다. 금방 허물어질 게 뻔한 좁고 서툰 무대에 옹기종기 모인 얼굴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결국 연극을 좋아하게 됐다. 내심 사람을 겁냈던 내가 처음으로 가장 안전하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 건 결국, 연극이었다. 혹시 당신에게도 연극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면, 언젠가 ‘잠시 섬’에 다녀와 보기를 추천한다. 당신이 누구를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 모든 순간이 연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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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강화 유니버스

[사진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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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문경

염문경 배우/작가
연극 <로봇을 이겨라> 시리즈, <도처의 햄릿>, <퀴어한 낭독극장> 등에 출연했다. EBS <자이언트 펭TV>, <연애톡강>, <이번 생은 선인장>의 작가이며,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모럴센스> 등의 각본에 참여했고, 단편영화 <현피>, <백야>를 만들었다. 에세이집 <내향형 인간의 농담>을 출간했다. ymk8902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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