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책임
이오진
43호
201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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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겨울밤
장소
연희동의 작은 카페
인물
기창(32세, 남) 주란의 애인. 카페 아르바이트 생.
주란(29세, 여) 기창의 애인. 무역회사 경리.
조명 들어오면, 기창이 청소를 위해 의자들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있다.
딸랑,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주란이 들어온다.
기창왔어?
기창과 주란, 가볍게 입 맞춘다.
기창아메리카노?
주란응.
기창,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준비한다.
주란, 바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주란사장님은 오늘 안 와?
기창아침에 왔다 갔어. 마감은 나 혼자 해 오늘.
주란요새 사장 바쁘네.
기창우유 넣을래?
주란아니, 설탕만.
커피와 각설탕을 주란 앞에 놓는 기창.
주란고마워.
기창넌 늘 설탕만 넣더라.
주란응. 나 우유 싫어해. 먹으면 설사해.
기창아, 그랬지.
주란오빠 기억나? 초등학교 때. 매일 아침마다 우유 나눠 줬었던 거. 하루에 하나씩 꼭 먹어야 했잖아.
기창그땐 다 그랬지. 우리 학교도 그랬어.
주란난 우유 먹으면 설사해서… 몰래 화장실에 가서 버리곤 했거든. 그런데 하루는 누가 그걸 일렀나봐.
선생님이 학교 끝나고 나를 불러서 뺨을 몇 대 때리더니, 그 날 애들이 남기고 간 우유를 다 먹으라고 했어.
자기 보는 앞에서.
기창미친년 아냐? 그래서 다 먹었어?
주란먹고 설사 했어.
기창(한숨 쉬며) 초등학교 때 이상한 선생들 진짜 많았지.
주란이젠 안 그러겠지?
기창지금이라고 다를까.
주란지금도 그럴까?
기창큰 틀은 안 변할 거야. 대한민국 공교육, 애들한테 무기력이나 가르치고, 문제 안 일으키는 인간형 만드는
시스템이잖아.
주란…오빤 가끔 그 시스템한테 되게 피해 본 사람처럼 말하더라.
기창스무 살 이후에 계속 힘들었으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년을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어.
주란하지만 오빤 나랑 다르잖아. (조금 망설이다가) 그 공교육 시스템 잘 따라가서, 문제 한 번 안 일으키고 좋은
고등학교랑 좋은 대학교 나왔고, 오빠 부모님 잘 살아서, 학자금 이자 낼 일도 없고, 대학 때 알바로 먹고 산 것도
아니고.
기창그래서 지금 알바로 먹고 살고 있잖아.
주란지금 이건… 그냥 오빠 선택이고.
기창…넌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싫어?
주란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기창내가 취직도 안하고 사는 거 후져 보여? 제도권 편입될 자신 없으니까, 패배자인 거 인정하기 싫으니까,
핑계 대고 있는 거 같아?
주란(당황해서) 아냐, 오빠 그런 뜻 아니야. 미안해..
사이.
기창난…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좋아. 난 돈 그렇게 많이 쓰지도 않으니까… 꼭 필요한 만큼만 벌면서 약간 가난하게.
대신 남들처럼 야근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가끔 너 회사 앞에 가서 기다리기도 하고. 혼자 음악도 듣고. 산책도
하고… 지금처럼 사는 거… 나 좋아.
주란응…
기창나이 서른 둘에 아는 형 까페에서 알바하면서 먹고 사는 거. 다들 한심하게 보는 거 나도 알아. 우리 엄마가 나한
테 맨날 뭐라 그랬었는지 알어? “너는 평범하게 대기업 들어가서 살면 될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니” 그랬어. 뭐,
그것도 몇 년 전이니 다시 만나면 그런 소리도 안 할지도 모르지만…
주란어머니가 아들 고생하는 거 싫어서 그런 거잖아.
기창주란아… 이런 말하면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자주 세상이 싫어. 원하는 세상이 아니야. 우리 대학 때
동아리 같이 할 때. 일주일에 세 번씩 스터디 하고 두 번 집회 나가고 그럴 때. 난 그때 노력하면 세상이 조금씩 바
뀌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닌 거 같애. 안 바뀌는 거 같애. 그냥 이딴 식인 거 같애.
주란(약간 냉소적으로) 오빠가 언제는 그렇게 희망찬 사람이었어?
기창…비난하는 걸로 들려.
주란그건 아니고. 나 오빠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는 거 아닌데…
오빤 세상에 그렇게 좋은 게 없어? 지금이 예전이랑 하나도 안 바뀐 거 같애?
오빠가 80년대에 대학 다녔어 봐.
오빠 이미 집회 때 잡혀서 감옥 갔거나 고문당하다 죽었을 걸?
기창주란아, 내가 원하는 세상은…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사는 세상이거든. 물론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불안할 수야
있겠지. 모든 인간은 불안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 주거의 문제. 그런 필수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잖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일의 삶을, 당장 오
늘의 삶을 불안해하면서 살고 있잖아. 사회는 책임지지 않고. 사회가 책임져야 할 걸 개개인의 열정과 의지로 해결
하라고 압박을 주는 거야. 왜 그 책임을 딴 데다 떠넘겨. 책임지지 않는 거잖아. 책임지지 않는 거. 그게 제일 나빠.
주란사회가 그런 게 오빠랑 무슨 상관인데. 오빠네 부자잖아.
기창(기가 막혀서) 내가 부모 돈 빼먹고 살아 지금?
주란그 돈 빼먹기 싫어서 안 빼먹고 사는 거잖아. 없어서 못 빼먹고 사는 게 아니라. 누구나 오빠처럼 살고 싶어해.
누구는 아등바등 죽기 살기로 목숨 걸고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줄 알아?
기창너 진짜 변했어. 말하는 거 우리 엄마 같아.
주란오빠 너도 제발 좀 변해라 좀!!!
사이.
서로 원망스레 바라보는 둘.
주란나 임신했어.
사이.
기창, 당황한다.
주란타이밍 너무 안 좋았지.
사이.
기창병원, 갔어?
주란갔어. 6주래.
기창, 기뻐하지 않는다.
기창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주란은 확실히 느낀다.
주란세상이 그렇게 싫어?
기창주란아.
주란그렇게 싫은 세상 오빠 참 줄기차게 의지적으로 잘 산다.
사이.
주란아이를 낳는 게 애를 책임지는 걸까?? 책임 져달라고 하는 말 아니야. 질문이야. 부모도 살기 싫어하는 세상에 애
를 낳는 게,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한 건가? 이 애도 태어나면, 선생님이 주는 우유 억지로 먹고 설사하는 거 같은 인
생 살아야 하나? (사이) 오빠는 애 분유값은 벌 수 있을까? 그러려면 오빠가 그렇게 싫어하는 제도권이란 거에 들
어가야 될 텐데. 그렇게 마지못해 애가 나오면, 우리는. 애는.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사이.
주란책임지지 않는 거. 그게 제일 나쁘댔지.
사이. 주란, 기창의 담배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낸다.
기창이 말리려 하지만 주란은 억지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주란, 담배 연기를 뿜는다.
주란맛있네.
그렇게 서로를 잠시 바라보는 둘.
주란, 나간다. 딸랑, 방울 소리.
기창이 남겨진다.
암전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