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종의 기원

김소라
77호 2015.10.08

장소
집

등장인물
산토끼 남자
집토끼 여자

산토끼
(들어오며) 오... 웬 상추야?
집토끼
왔어? 오늘 일찍 끝나서 오는 길에 친구 텃밭에 들렀거든. 손 씻고 와.
산토끼
어. 배고팠는데 잘 됐네.

두 토끼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산토끼
아. 맛있다.
집토끼
이것도 싸 먹어봐.
산토끼
뭔데? (냄새가 역하다) 킁. 이거 뭐야? 무슨 냄새가 왜 이렇게 역해?
집토끼
이거 몰라? 고수잖아. 이게 얼마나 맛있는 건데!

상추에 고수를 한 웅큼 싸서 먹는 집토끼.

산토끼
맛있어? 잘 먹네?
집토끼
맛있다니까. 이거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자기도 먹어봐. 위장 장애 있는 사람한테도 좋다 그러더라구. 처음에만 그렇지 먹기 시작하면 중독된다니까!
산토끼
싫어. 나는 향 있는 음식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근데 자긴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어?
집토끼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가 좋아했어. 엄마도 처음엔 냄새도 맡기 싫어하시더니, 한 번 아프고 나서인가? 그때 입덧하는 사람처럼 갑자기 고수를 찾더라고. 그 뒤로는 없어서 못 드셨지. 이게 나는 철이 있거든. 암튼 나도 엄마 따라 한두 번 먹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고수 마니아 됐잖아. 사람들이 그러는데 이거 쌀국수에 넣어 먹어도 진짜 맛있대. 우리도 내일 쌀국수에 넣어 먹어볼래?
산토끼
난 별로!
집토끼
그러지 말고 자기도 일단 한번 먹어봐! 어? (상추에 고수를 싸서 주는 지수)
산토끼
싫다니까. 자기나 많이 드세요!
집토끼
에이, 한 번만 먹어보라니까? 눈 딱 감고 먹어보라고! 그럼 내가 왜 이렇게 고수를 좋아하는지 자기도 금방 알게 될 테니까.
산토끼
나 지금 상추쌈 엄청 맛있게 먹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냥 냅두세요!
집토끼
(정색하며) 나 사랑한다며?
산토끼
갑자기 여기서 사랑타령이 왜 나와?
집토끼
사랑하면 한 밤중에 8차선 횡단보도도 뛰어 오는데 이거 하나 못 먹어? 나 사랑하면 한번 먹어봐! 어?
산토끼
(표정 살짝 굳으며) 유치한 거 알지? 밥 맛 떨어지려고 한다. 얼른 먹기나 해!
집토끼
자긴 항상 이런 식이야.
산토끼
또 뭐가?
집토끼
그냥 못 이기는 척!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준 적이 없잖아.
산토끼
못 이기는 척 자기가 해 달라는 대로 해준 적도 많았어. 잘 생각해봐.
집토끼
내가 자기한테 언제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먹으라고 한 적 있어? 지금 이거 하나잖아! 이거. 고수는 우리 엄마 추억이 담긴 음식이라서!
산토끼
(좀 미안한 듯) 알았으니까 그만해! 내가 미안해.
집토끼
(오기를 부리며) 미안해? 그럼 먹어봐. 자! 아!

집토끼 끝내 상추쌈을 산토끼 입에 넣으려고 한다.
산토끼 참았던 화가 난다.

산토끼
(낮은 목소리로) 하지마.
집토끼
아! 먹어보라고!

집토끼 산토끼의 입에 억지로 쌈을 우겨 넣으려고 하고
산토끼 고개를 돌리고 집토끼의 손을 치우다가 쌈을 떨어뜨린다.
바닥에 상추와 고수가 널브러져 있다.

산토끼
에이, 진짜!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집토끼
(치우다가 발끈해서) 이거 하나 먹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씹어서 꿀꺽 삼키는 게 힘드냐고! 이거 하나도 못 해주면서 날 위해 죽을 수는 있어?
산토끼
못 죽어! 아니 안 죽어! 그러니까 제발 강요 좀 하지마! 그냥 니가 좋은 건 니가 좋아해. 니 추억이잖아! 왜 매번 너한테 다 맞추라고 하는 건데? 그냥 밥 좀 편하게 먹으면 안 되니?
집토끼
이 향이 그렇게 싫어?
산토끼
그래, 안 먹어도 향냄새가 지독하게 올라온다. 맞어, 이제 생각나네. 그거 절간에 스님들이 좋아하는 나물이지? 난 보기만 해도 싫다고!
집토끼
내가 우리 엄마 추억이라고 얘기 했는데도? 내가 엄청 좋아하는 건데도? 나 사랑한다며!
산토끼
니가 좋아해도 내가 싫을 수가 있어! 고수랑 사랑하고 무슨 역학적 관계라도 있어?
집토끼
보통 사람들은 그래. 사랑하면 함께 하고 싶고 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
산토끼
그럼 내가 여자처럼 앉아서 오줌이라도 싸야 한다는 거야? 그건 독점욕이나 소유욕이지 몇 번을 말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집토끼
아니 넌 날 무시해서 그러는 거야. 역학적 관계? 그래 사람들이 읽는 책에도 나오더라.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그랬지. 사람은 처음엔 하나였대. 사람의 선조들은 원래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를 가진 공 모양과도 같았었다고 그랬어.
산토끼
그래서?
집토끼
원래는 몸도 마음도 한 사람이었다가 힘이 너무 세지니까 그만 오만해지고 말았대. 그 벌로 하나가 둘로 쪼개지는 형벌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쪼개진 두 사람은 원래 하나였던 대상을 애타게 찾게 되었고. 마침내 이렇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다시 하나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하던데! 아니야?
산토끼
어디서 개똥철학은! 그럼 내가 너를 만나기 전에는 미완의 존재였다는 거네?
집토끼
당연하지 너랑 나. 우리도 하나가 될 때서야 비로소 완전한 처음 존재가 될 수 있어.
산토끼
내가 너랑 하나의 똑같은 존재였다고? 그게 말이 되니? 신이 어느 하나에 종속되게 우리를 만드셨다고?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완벽한 하나였다니! 우리라는 말은 서로 다른 너랑 내가 만나서 우리를 이루는 거야. 신이 사람을 만들 때 똑같은 사람을 만든 게 아니라! 신이 사람을 만들 땐 처음 사람을 만들고 그 다음엔 전혀 또 다른 사람을 만들었다고! 아담과는 생물학적으로도 다르고 성품도 다른 하와를 만들고. 그들이 관계를 맺고 나갈 때 비로소 하나가 된 거라고! 플라톤이 아무리 똥 폼 잡고 얘기해도 그도 결국엔 사람이지 신이니?
집토끼
그래서 결론이 뭐야? 어쨌든 나랑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거야?
산토끼
아직도 못 알아들어? 지금 너랑 난 우리로 여기 함께 있어. 이거면 충분한 거 아냐? 하지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너랑 나랑은 니가 말하는 하나가 되지는 못해! 그럴 거면 차라리 로봇을 하나 만들어. 너랑 음식도 취미도 생각도 똑같은 로봇!
집토끼
그래! 곧 나온다더라. 너랑 함께 하느니 차라리 로봇이랑 함께 하는 게 행복하겠다. 사사건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지적에 비난에! 내가 너한테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
산토끼
그 소리! 왜 안 나오나 했어. 그럼 그거 다 갚으면 너 떠나도 되는 거니?
집토끼
어떻게 갚을 건데? 울 엄마 너랑 결혼도 안 하고 내가 이렇게 사는 거 얼마나 속상해 하셨는데? 그렇게 나랑 인연 끊고 있다가 황망하게 가셨어. 니가 그 때 고집을 조금만 꺾어 줬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난 이 고수 향 만 맡으면 엄마 생각이 너무 간절해. 우리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집토끼 엉엉 운다. 그런 집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산토끼 천천히 입가를 닦는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일어서는데.

집토끼
(눈물 닦으며) 어디가?
산토끼
잘 먹었어. 가서 좀 쉴게. 해야 할 일도 좀 있고.
집토끼
뭔가 틀어지면 혼자 동굴 속으로 숨어야지. 왜 안 그러나 했어. 니가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우린 토끼야. 사람인 척 하지마.
산토끼
그래 종이 다른 토끼지. 너는 집토끼. 나는 산토끼니까. 서로 아무리 사랑을 해도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존재지.
집토끼
(갑자기 슬퍼진다) 아니야, 자기야. 우리가 더 노력하면 될 지도 몰라!
산토끼
아니 그건 노력으로도 안 돼. 절대 안 돼.
집토끼
(절규하듯) 우린 하나가 될 수 있어.
산토끼
인정할 건 인정해라 제발.
집토끼
아무리 종이 달라도 우린 토끼잖아. 봐! 우리가 다른걸 아무도 모른다고.
산토끼
그래 우린 토끼야. 어쩌다 숲속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함께 있지만 서로 다른 존재인 토끼지.
집토끼
그날 널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커다란 개에 쫓겨 다친 너를 그냥 숲속에 두고 왔어야 했다고! 내가 그동안 널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넌 정말 뻔뻔한 산토끼야.
산토끼
그래. 내가 뻔뻔할 지도 모르지. 근데 너도 희생이라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어. 진짜 희생을 했다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법이니까.
집토끼
이 냄새나는 풀 한번 먹어달라는 게 대가를 치루라는 걸로 여겨졌니? 너 참 대단한 존재구나.
산토끼
아니. 나는 평범한 토끼야. 니가 그렇게 마음 아파 할 존재가 못 돼.
집토끼
그래서 이제 날 떠나려고?
산토끼
아니.
집토끼
그럼?
산토끼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잠시 동안만.
집토끼
돌아 올 거야?
산토끼
모르겠어. 어쨌든 지금 이렇게 함께 있다간 우리 둘 다 불행해져. 니 추억이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 향을 맡으면 좋은 생각이 날 수 있게.
집토끼
난 니가 있어야 행복해져.
산토끼
아니 너 혼자 있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없다면 같이 있어도 행복할 수 없는 거니까.

집토끼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연다.

집토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산토끼
나는 모르지. 하지만 잘 됐으면 좋겠다.
집토끼
(고수를 가르키며) 이거 끝까지 안 먹을 거지?
산토끼
어, 안 먹을 거야.
집토끼
알았어. 잘 가.
산토끼
그래. 잘 있어.

산토끼 집을 나간다.
집토끼 산토끼가 나간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수를 천천히 뜯어 먹는다.
입안에 알싸하게 퍼지는 고수 향.

마침.

호들갑 작가소개
전주에 살고 있다. 연극을 보러 서울연극센터 앞을 지나가던 중 10분 희곡 릴레이 낭독극을 보게 되었다. 세 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나도 짧은 희곡을 써 보았다. 산토끼와 집토끼의 간극을 메울 순 없지만 사람들과의 소통의 끈은 놓지 않으려 썼다. 무대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지 좀 되었지만 여전히 연극은 내게 서투르지만 설레는 첫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