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열토끼방봉클럽쇼
이지훈
80호
201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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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명석
사연
오열
때
정오
장소
자취방과 호텔
무대
침대, 스툴, 그리고 옷장
무대 중앙 의자에 정장을 차려 입은 명석이 앉아 있다. 카드 명세서를 훑어보던 명석은 몇 개의 내역을 체크하더니 휴대폰으로 카드사에 전화를 건다.
- 명석
- 안녕하세요, 라이어캐쉬카드사죠? 다른 게 아니라 카드 사용 내역에 오류가 있는 것 같아서 확인 좀 부탁드리려고요. 호텔에 간 적이 없는데 결제 내역이 찍혀 있어서요. 5회 정도네요. 어디보자, 대충 보니까 시… 입만 원이 아니라 백만 원이야! 공이 하나 더 있다고! 이거 뭐야, 시발. (사이) 아, 죄송합니다.
사연, 바쁜 듯 힐을 구겨 신으며 등장한다.
- 사연
- 토끼야.
- 명석
- 아니, 그러니까 내가 호… 잠시만요. (사연에게) 어구, 우리 방봉이.
- 사연
- 나간다. 오늘 면접 잘 다녀오고. (사연 퇴장)
- 명석
- 다녀와. (수화기에 대고) 네. 5, 6, 7, 8, 9일에 사용했다고요. 오늘이 10일이니까 어제까지 사용한 거네요. 아, 글쎄 저는 사용한 적이 없다니깐요. 카드 분실한 적도 없고요. (안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사연, 다시 등장.
- 사연
- (명석의 카드를 낚아채며) 토끼야, 나 카드 뻑나서. 오늘 하루만 빌릴게.
사연, 퇴장.
- 명석
- 이거 뭐 어디로 개인정보 샌 거 아닙니까? 아, 그러니까 제가 가지고 있다니까요. (놀란 표정으로) 잠깐만.
명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사연, 밧줄을 들고 등장해 침대에 누우면 조명 바뀌고 숨어있던 옷장이 노출된다. 아이 다루듯 밧줄을 매만지는 사연. 메리츠 호텔 501호. 명석 주변을 둘러본다.
- 명석
- 그러니까 일은 그만 뒀고 갈 곳이 없어서 죽치고 있다.
- 사연
- 응. 엄마 집에는 못 들어가겠으니까.
- 명석
- 눈을 피하지 않는 걸 보니 진실이로군. 뭐 그래. 그렇다면야. 근데 제일 이해 안 가는 게 있다.
- 사연
- 뭔데.
- 명석
- 그거.
- 사연
- 밧줄? 이거 어디에 쓰는 것 같아?
- 명석
- 성인들의 장난감?
- 사연
- 너답다.
- 명석
- 그럼 뭔데.
- 사연
- (목에 두르며) 이렇게 사용하는 거야.
- 명석
- 왜.
- 사연
- 거짓말 아니라니까.
- 명석
- 아니, 왜 죽으려는데.
- 사연
- 이유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글쎄 심심해서? (손목시계를 보며) 그런데 이러고 있어도 돼? 곧 면접시간인데.
- 명석
- 지금 면접이 문제냐.
- 사연
- 왜 너 이번 면접 목숨 걸지 않았었나?
- 명석
- 방봉아. 나한텐 너보다 소중한 게 없어.
- 사연
- 미친 토끼네.
- 명석
- 뭐라?
- 사연
- 이정도 했으면 알아들어, 좀. 그냥 가시라고. 혼자 있고 싶으니깐.
- 명석
- 정말 죽을 거야?
- 사연
- (귀찮은 듯이) 그래, 이승계 토끼야.
- 명석
- (어색하게) 나, 나를 보고도 죽고 싶어?
- 사연
- 설득을 글로 배우셨나 봐요.
- 명석
- 방봉이가 너무 장난 식으로 그러니까 그렇지.
- 사연
- 별로 진지한 이야기도 아닌데 진지 드시면서 하실까?
- 명석
- (엄하게) 사람의 생명은 존엄해. 그게 누구든.
- 사연
- 아, 다큐 찍는 타이밍 하곤. 권리와 자연권 따위 강요하지 마. 골 아파서 더 뒤지고 싶으니까.
- 명석
- 무, 슨 말이야, 나는, 너 밖에, 없,어.
- 사연
- 난 너 때문에 죽고 싶어.
- 명석
- 뭐?
- 사연
- (엉덩이를 긁으며) 네가 너무 열심히 사니까 살맛이 안 나. 너무 열정적으로 사셔서 나까지 타들어가는 것 같다니깐.
- 명석
- 그런 거 말고 다른, 뭐랄까 좀 근사한 자기변호는 없을까.
- 사연
- 죽음을 변호해 볼까? 그냥 다른 걸 인정해. 네 우선순위가 삶이라며 내 우선 순위는 죽음일 뿐이니까. 명석아 나는, 진심이야. (사이) 우리 사이에 대해서 의아하다면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해줄게.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지금까지 사건이 없었어. 이벤트나 이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뭔가 인생의 쓴 맛을 함께 하는, 그런 전우애도 약간 있어야 하는 건데. 넌 언제나 함께 하려고 할 생각 않고 네 인생 먼저 닦는데 혈안이 되었잖니. 네가 날 버리지 않더라도 내가 못 따라간다. 그럼 못 써 얘.
- 명석
- 누나.
- 사연
- 그래, 동상.
- 명석
- 쇼 그만해. 그만하고 나가자. 백만 원 면제해줄게.
- 사연
- 진짜 쇼 보여줄까? (사이) 실은, 나 혼자 죽으려던 거 아니다? (옷장 쪽에 대고) 이제 나오셔도 돼요.
옷장 뒤에서 중년남자 등장한다. 이 남자는 명석과 같은 정장을 입고 있지만 방금 거사를 치룬 듯 흐트러져 있고 아랫도리는 무엇인가를 착용해 부자연스럽다.
- 오열
- 아, 반갑습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야기 잘들 나누시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이만 갈까요?
- 명석
- 이건 뭔 개 같은 상황이야?
- 오열
- 아유, 하시는 말씀이 요만큼 거슬리네? (인심 좋게 웃으며) 오해 하실 만도 합니다. 어떻게, 차분히 이야기 좀 들어보시겠어요?
- 사연
- 클럽에서 만났어.
- 명석
- 뭐! 클럽!
- 사연
- 그런 클럽 말고.
- 오열
- 아유, 방봉 씨도 참 다짜고짜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해하시잖아요.
- 명석
- 뭐! 방봉!
- 오열
- 네, 방봉. 클럽네임인데 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나요?
- 사연
- (웃으며) 계속 그렇게 불러 주세요. 그 편이 훨씬 편하니까요.
- 명석
- 심히 불편해!
- 사연
- 진정해, 닉네임일 뿐이잖아.
- 오열
- 맞아요, 토끼띠.
- 명석
- 그렇게 부르지 마! 무슨 클럽이기에 닉네임까지 쓰는 거지? 방봉하면서 헐떡헐떡이는 거야?
- 오열
- 그런 저급한 헐떡거림이랑은 거리가 멉니다. 그러니까 방봉 씨를 방봉하자고 해서 방봉하는 그런.
- 명석
- 그만.
- 오열
- 숭고한 온라인 클럽이랄까.
- 사연
- 주제가 자살인 노론장 같은 그런 거. 클럽명은 “쓰로틀링”이고
- 오열
- 목을 조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 사연
- 멤버는 우리 둘 뿐이고.
사이. 명석 품에서 과도를 꺼낸다.
- 명석
- 혹시 몰라서 가져와봤는데 이게 뭘까요?
- 오열
- 평범하지만 토끼 씨가 드니까 멋져 보이는 과도네요.
- 명석
- 틀렸어. 이건 진실의 검이다. 방봉, 아니 한사연 씨께서는 이 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요?
- 사연
- 알다마다. 내가 바람피우면 저걸로 가슴을 도려낸다고 했어. 중증이야.
- 오열
- 진실의 검 날이 매우 무뎌 보이네요.
- 명석
- 그런 거 기억하지 말고!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이 칼을 꺼내면
- 사연
- 진실만을 말한다. 알지.
- 오열
- 저도 진실을 고해야 합니까?
- 사연
- (고개 숙이며)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열
- 예스, 레이디.
- 명석
- 그리고 하나 더 있었어.
- 사연
- 한 가지를 명할 수 있다. 이게 원래 사랑을 나눌 때만 적용되는 건데.
- 명석
- 닥치고 저 아저씨한테 입고 있는 정조대 벗으라 그래. 아까부터 번쩍거리는 게 거슬려서 대화에 집중이 안 되니까.
- 사연
- 부탁드립니다.
오열, 정조대를 벗는다.
- 명석
- 자, 이제 질문하겠어. (사이) 지난 5일 동안 같이 있었나?
- 사연
- (오른손을 들며) 그렇습니다.
- 명석
- (오열에게) 개새끼야!
- 오열
- 네?
- 명석
- 왜 하필 저런 놈이야? 얼핏 봐도 우리 아버지랑 동년밴데.
- 오열
- 저기, 저희는 진짜로 죽으려고 만났습니다. 혼자 죽기엔 너무 두려워서 서로 의지하고자 서로 멘티와 멘토를 자청한, 순수한 영혼들의 만남이랄까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가 죽음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고,
- 명석
- 감방 가서 썩어 죽는 것도 방법이지.
- 오열
- (진지하게) 그런 말씀 마세요. 죽고 싶습니다. 제발 죽는 방법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게 해주세요.
- 명석
- 하지 마.
- 오열
- (한 발 더 다가오며)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요?
- 명석
- 오지 마.
- 오열
- (진심을 다해) 죽고 싶어! 죽어! 죽어! 죽여 버려! 죽습니다!
명석, 오열의 목에 칼을 겨눈다.
- 오열
- (뒤로 달아나며) 이거 가까이에서 보니까 날이 살벌합니다.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습니다!
- 명석
- 저기요.
- 오열
- 네?
- 명석
- 그만하고 물러나세요. 말하면 할수록 진심하고 더 멀어지는 것 같으니까.
- 오열
- 낯섭니까?
- 명석
- 뭐?
- 오열
- 이런 제 모습이.
- 명석
- 오열 씨, 장난 그만 합시다. 지금 심각해요.
- 오열
- 아니오, 하나도 심각하지 않아요. 그건 토끼 씨의 오해입니다.
- 명석
- 당신 지금 내 여친하고 방을 잡고 있다고.
- 오열
- 맞습니다.
- 명석
- 그리고 나한테 걸렸고
- 오열
- 네. 물론 방봉 씨가 자발적으로 토끼 씨를 모시긴 했습니다만.
- 명석
- 그리고 방금 또 토끼라고 불렀지.
- 오열
-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명석
- 거기에 내 돈을 뿌리고 있잖아.
- 오열
- 돈은 제 계좌가 풀리는 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토끼 씨, 자꾸 말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심각하지 않아요. 이 죽음은 당신이 사모하는 방봉 씨가 염원하던 겁니다. (오열이 칼을 들이대자) 우리는 단지 증명하고 싶을 뿐입니다!
- 명석
- 뭘?
- 오열
- 죽음이 아닌 죽음의 주변을요. 그 꼴이 얼마나 우습고 사랑스러운지 토끼 씨도 직접 보셔야 합니다.
사연, 뒤 쪽에서 캠코더를 가지고 온다.
- 사연
- 자, 토끼야. 이거 받아.
- 오열
- 아, 그게 있었군요. 역시 현명하십니다.
- 사연
- 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잖아. 혹시 몰라서 캠코더로 우리가 하는 걸 기록해 놓았어. 우린 이미 끝났고 내가 갈 때 가더라도 오해는 풀어주고 가려고.
- 오열
- 조금만 서로를 도와주게 되면 원칙에 근거하여 자살의 의미가 퇴색되고 타살이 되어버리니 최대한 서로 터치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자살에 실패했고요. 목을 매려고 하면 줄이 풀려버렸고 칼 위로 엎어지려고 하면 칼끝이 휘어버리거나 했죠. 우리가 죽음에 실패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기 위해서 촬영을 시작했고
- 사연
- 그리고 우리의 죽음을 기록하기 위해서 촬영을 시작했어. 이게 신박한 게 뭔지 알아? (방방 뛰며) 완벽하게 촬영이 되면 자동으로 유투브에 업로드 된다는 사실이야!
- 오열
- (사연의 손을 마주 잡으며) 꺄아! 인스타그램에도 자동으로 업로드가 되지요!
- 사연
- (명석에게 캠코더를 쥐어주며) 그러니까 이걸 확인해보도록 해. 여기 누르면 재생 돼.
긴 사이. 명석, 캠코더를 내려다보며 깊은 고민에 빠진다. 한 참 뒤 명석, 캠코더를 재생한다.
- 오열
- 아, 저, 그, 저기에서 옷을 벗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목을 매게 되면 구멍이란 구멍에서 체액이 쏟아져 나온다고 해서. 저기 방봉 씨가 입고 있는 옷은 작년 크리스마스에 토끼 씨가 선물해준 거라 더럽힐 수 없다고.
- 사연
- 엊그제잖아요.
- 명석
- (훌쩍이며) 맞네.
- 사연
- 야, 너 우냐? 얼탱이가 없네. 찌질하게 왜 이래. 아우, 정 떨어져.
- 명석
- 아니, 그게 있잖아. 내가 우는 게 아니라. 그냥 눈물이 막 나네. 이게 왜 이러는 거지? 진짜 황당하고 화나거든? 근데 눈물이 막 흘러. 진짜 난도질 하고 싶거든? 근데 여기에서 찍힌 너 보면 왜 이렇게 웃고 있냐. 진짜 즐거워 보이거든? 이거 봐, 이거. 왜 이렇게 웃는 거야? 죽는 게 즐거워? 나쁜 년, 입을 찢어버리고 싶네. 뭐 이런 게 다 있어.
명석, 부들거리며 정지 버튼을 누른다.
- 명석
- 아, 젠장. 쪽 팔려서 더는 못 보겠다. (칼을 건넨다.) 자, 뒈지든가, 잘 살든가 둘 다 하든가 알아서 해라. 나도 63빌딩 꼭대기에 올라가보든지, 집에서
- 사연
- 선생님, 저는 토끼가 캠코더를 끝까지 볼 줄 알았어요. 보고 까발려지길 바랐는데.
- 오열
- 그러게 말일세.
- 사연
- 뺨이라도 한 대 맞을 줄 알았는데. 그러길 바라기도 했거든요.
- 오열
- 우는 모습이 참 예쁘더군, 청년. 말하는 싸가지도 그렇고.
- 사연
- 저도 처음 봐서요. (사이) 오늘은 물 건너 간 것 같아요.
- 오열
- 그런 것 같지? 음.
- 사연
- 죄송합니다.
- 오열
- 어쩔 수 없지. 나도 사람인지라 찜찜하긴 하구만. 그냥 우리 여기까지 하지. (사이) 사랑했었네.
- 사연
- 네? 아, 네.
- 오열
- 이제 사건이 충분한가?
- 사연
- 네?
- 오열
- 좀 충만 해졌냐, 이 말이야. 의욕 좀 생겼냐고.
- 사연
- 정말 부끄럽고 인정하기 싫습니다만, 그렇습니다.
- 오열
- 그래, 그럼 됐네.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건 그래도 살아있다는 거 아닌가. (사이) 날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언제 즈음 나타나려나.
- 사연
- 죄송합니다.
- 오열
- 죄송하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네. (사이) 그 칼은 어떻게 할 텐가? 쓸모없다면 나한테 주지 않겠는가. 진실의 검이라는 이름이 썩 마음에 들어서. 가는 길에 호텔 로비에 미안하다고 말 좀 전해주고.
명석, 칼을 던지고 퇴장. 긴 사이.
사연, 오열에게 칼을 건네고 뛰쳐나간다. 오열, 칼을 내려다보고 입을 벌린다. 암전.
- 호들갑 작가소개
- 지나가던 한량이 희곡을 모방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