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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입은 남자

신영은
85호 2016.02.04

한 남자가 있다. 30대 후반의 남자다.
낡은 듯한 정장을 입고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는 책자를 보고 있다. 시간이 좀 흐른다.

한 남자가 쟁반에 커피를 들고 나온다.
앉아있던 남자와 비슷한 연배로 보인다.
그 역시도 정장차림이다.

청년
오래 기다리셨죠?
남자
아닙니다. (보고 있던 책자를 덮는다.) 이렇게 커피까지 대접해주시고 감사합니다.
청년
커피가 커피믹스 밖에 없어서요.
남자
아... 커피 믹스요. 감사합니다. 저는 실은 평소에 녹차를 주로 마시는 편입니다. 녹차가 아무래도 건강하다는 이미지가 있어서요.
청년
아, 죄송해요.
남자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앞으로는 녹차를 좀 즐겨드시면 어떤가 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선교활동을 매주 다니고 있는데 이렇게 집에 드려주시고, 차까지 대접해주시는 경우는 굉장히 오랜만이라서요.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지만, 요즘은 아주 드물어서요. 아니, 실은 거의 없다고 해야죠. 그래서 말입니다.
청년
네?
남자
아니, 아주 기분이 좋다고요. 다시한 번 감사해요.
청년
아닙니다. 감사는요.
남자
대부분이 저희같은 사람들을 피하지 않습니까?
청년
어휴, 그럴리가요.
남자
아이고, 저희도 그 정도는 다 알지요. 종종 서운하고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들 그렇잖아요? 본인이 아는 익숙한 것에 머무는 걸 선호하죠. 종교라는 것이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사실 아주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청년
네... 그렇죠.
남자
그런데 어디 나가시려던 건 아닌가요?
청년
네?
남자
아니, 정장을 입고 계셔서요.
청년
아...네. (쑥스러운 듯 웃는다.)
남자
실례가 안된다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청년
저요? 아... 저는 취업 준비생입니다.
남자
취업? 아... (연배가 그렇게는 안 보인다는 눈빛이다.)
청년
(그 눈빛을 읽은 듯) 다른 일을 하다가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서요. 그냥 이렇게 정장을 입고 있으면 기분이...좀...그걸 뭐라고 해야하나....저...
남자
아! 마음을 다 잡는 거 아닙니까?
청년
네?
남자
집에서도 면접을 보는 것처럼, 아니면 뭐 일을 하는 것처럼 그런 몸 상태를 만드는거죠. 그러면 긴장도 되고, 또 정말 이렇게 정장을 입고 밖에서 일을 해야겠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 잡는데 도움이 될 거 같은데요?
청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남자
네?
청년
아니요. 그렇게 이해해주셔서 말이죠. 아마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이해해주지 못할거 같아서요.
남자
네. 맞는 말씀입니다. 뭐 제가 특별한 건 아니지만, 일반 분들을 이해를 하는 폭이 좀 좁을 수 있죠. 이것이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죠. 이해를 하려면 뭐가 가장 필요할까요? 바로 ‘애정’이죠. 이것이 기본이 되지 않는 한 사람을 사람을 이해할 수 없거든요.
청년
네...
남자
그렇게 인간에게 애정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청년
?!
남자
바로 신입니다. 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없어요.
청년
인간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남자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는 것이지요. 성서를 통해 신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과 은혜를 배우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이 비단 나만이 아니라 내가 아닌 상대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책자를 편다) 이걸 읽어보시면.
청년
(책자의 방향을 다시 남자 쪽을 향하도록 돌린다.) 아니요.
남자
네?
청년
말해주세요.
남자
네?
청년
말로 해주셨으면 해서요.
남자
..... (호탕하게 웃는다.) 아, 읽은 것에 좀 약하신 편인가봐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종종 계시지요. 저도...
청년
아니요. 저는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너무 많이 읽어서요.
남자
아... 많이 읽었다....
청년
네. 인터넷 뉴스도 읽고, 페이스북도 읽고, 다른 사람이 쓴 자소서도읽고요. (천천히 말을 쑥스러워하면 말을 잇던 그는 점차 말이 빨라지고 많아진다.) 가장 많이 읽는건 아무래도 구직광고지만요. 구직광고도 읽어보면 얼마나 다양한지 몰라요. 이렇게 많은 일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참 신기해요. 그러면서 이 많은 일자리 중에 제가 하나도 못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좀 자죄감이 들기도 하지요.
남자
아이고! 그러실 거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신께서 다 하나하나의 이유를 가지고
청년
특히 남의 자소서를 읽는 게 가장 재미는 있어요. 참 사람들은 스스로를 멋지게 포장하기도 잘하고, 별 것도 아닌 일이나 경험을 그럴싸하고 의미있는 일로 만드는 걸 잘하는 거 같아요. 그러면서 왜 나는 그런 걸 못하나 하는 좌괴감에 또 빠지고.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거에 꽤 익숙하거든요. 몇 년을 이렇게 지내다보면 사실 이것이 또 내 일인 거 같은 기분도 들고요.

듣고 있던 남자는 점차 청년이 불편해진다.

남자
(시계를 보며) 아이고! 제가 약속이 있는 것 깜박했습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지요. 이게 한창 이야기가 좀 되는가 싶었는데.

일어서려는 남자의 손목을 청년이 잡는다.

청년
아직 아무것도 이야기 안 해주셨잖아요.
남자
네?
청년
성서에 적혀있는 이야기들이요. 해주신다고 들어오신 거잖아요.
남자
아... 그렇죠...
청년
그러면 약속은 좀 미루시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남자
.... 근데 중요한 약속이라서요. 제가 다음에...
청년
그때는 제가 취업이 됐을지도 모르니까요.
남자
아니, 그게...
청년
듣고 싶어요. 말이 듣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남자
...
청년
참 오랜만에 사람 말을 들으니까 참 좋네요. 제가 요즘 드는 거라고는 뉴스에 나오는 아나운서나, 서류를 넣은 회사 직원 전화 목소리 뿐이거든요. 아세요? 이렇게 몇 년을 지내다보니 사람이 사람하고 말하고 말을 듣는다는 게 그렇게... 이런, 커피가 다 식으셨네요. 제가 새로 갖다드릴게요.
남자
아, 아닙니다!
청년
아니요. 녹차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어디 한 번 티백이라도 있나 찾아볼까요? 잠시만요.

청년, 남자의 커피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잠시 남자는 부엌의 기척을 살피는 듯.
그는 살며시 일어나 책자를 챙겨 나간다.
조용히 문 앞으로 간다.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린다.
문이 잠겨있다.

암전.

호들갑 작가소개
'아무렇지도 안게 여겨지는 순간과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가 너무 신경이 쓰여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극작가가 된다' 는 글귀를 아끼며, 그런 순간과 대화가 신경쓰여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사소하고, 작고, 흔하고, 반복되는 것들을 좋아하는.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