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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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이 현(43세, 여) 프리랜서 번역가
이 준(16세, 남) 중학생. 현의 아들
배경
제주도 농가를 개조한 서점 겸 게스트하우스. 흰 벽에 통나무 서까래가 드러나 있다. 무대 왼편에는 푹신한 3인용 소파가 있고, 오른쪽에는 카운터 겸 업무용 목재 책상이 있다. 벽면에는 현과 준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저녁, 고요한 가운데 멀리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소리에 섞여 가끔씩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현은 소파에 파묻혀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준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준, 현을 흘끔 쳐다본다. 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준, 헛기침을 한다.
- 준
- 엄마, 나 이사 갈까 해.
- 현
- 응. (사이) 응?
현,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준을 바라본다. 준은 현의 시선을 피한다.
- 현
- 무슨 말이야?
- 준
- 말한 대로야.
- 현
-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어디로? 어떻게? 아니, 언제? 왜?
- 준
- 하나씩만 물어봐.
- 현
- 여기가 싫어? 엄만 또 이사 갈 자신 없어.
- 준
- 엄마는 안 가도 돼.
- 현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준
- (사이) 나, 해양고등학교 가려고.
- 현
- 해양.. 고등학교? 갑자기 왜 거길 가겠다는 거야?
- 준
- 갑자기 아니야. 계속 준비했어.
- 현
- 근데 왜 얘기 안 했어?
- 준
- 이럴 거 같아서.
현, 노트북을 덮고 준을 향해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준은 시선을 피하러 슬쩍 일어난다.
- 현
- 어디 가?
- 준
- 고양이 찾으러.
- 현
- 걔넨 알아서 와.
- 준
- 새끼들도 있는데, 감기 걸릴지도 몰라.
- 현
- 안 돼.
- 준
- 뭐가 안 돼?
- 현
- 왜 하필 해양고등학교야. 게다가 왜… (한숨을 쉰다) 위험한 일을 하려고 그래.
- 준
-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엄마도 그랬잖아.
- 현
- 엄마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살았으니까, 너도 그러겠다는 거야 지금?
- 준
- 꼭 그렇다기 보다는…
- 현
- 엄만 성인이잖아! 넌 아직 어려. 벌써부터 정해버리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어.
- 준
- 지금 안가도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어.
- 현
- 준, 어렸을 때 이사 다니느라 힘들었던 거 알아. 그건 지금도 미안해.
- 준
- 미안해할 필요 없어.
- 현
- 너 이사 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할 때… 어린 애한테 상처 주는 내가 싫었어. 그래서 뭐든 각오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야.
- 준
- 무슨 말이야?
- 현
- 이런 식으로… (사이) 복수하는 건 우리 둘 다에게 안 좋아.
준은 의외라는 듯이 현을 바라본다.
- 준
- 전혀 그런 거 아닌데. 그냥 내가 하고 싶어. (사이) 그리고 약속했어.
- 현
- 무슨 약속?
- 준
- 할망이랑. 돌아가시기 전에.
- 현
- 준아, 할머니 돌아가신 건 엄마도 너무너무 슬퍼. 그치만…
- 준
- 할망이 그랬어. 너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고. 할망은 물질하기 싫었는데, 평생 물질만 하고 살았다고.
- 현
-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왜 갑자기 해양이야.
- 준
- 나는 그냥… 돌아다니는 게 편해.
- 현
- 돌아다니는 거 싫다고 그랬잖아. 그거 하면 평생 떠돌아야 한다구!
- 준
- 엄마는 번역 했어도 평생 떠돌면서 살았잖아.
- 현
- 집 가지고 싶댔잖아. 그래서 집도 생겼고. 그런데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거야.
- 준
- 여기도 그렇게 집 같지는 않아.
- 현
- 집 같지 않다니, 뭐가 맘에 안 들어?
- 준
- 여기 좋아. 근데… 여기는 게스트하우스잖아. 사람들은 왔다가 금방 가고.
- 현
- 게스트하우스 하는 게 싫으면 안 해도 돼. 엄마가 번역 더 많이 할게.
- 준
- 엄마가 그랬지. 사람은 누구나 떠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엄마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 현
- 준아.
- 준
- 엄마도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 현
- 엄마가 그때 그렇게 말한 건…
- 준
- 여기에 있으면, 행복하지 않을 거 같아.
- 현
- 엄마가 같이 있는데도, 그런데도 여기에 있는 게 불행해?
- 준
- (사이) 그건 내가 엄마한테 했던 말인 것 같은데.
준, 말없이 현을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는다. 현, 고개를 든다.
- 현
- 할 말 있으면 해.
- 준
- ‘바다는 안 보여요’ 사장님 있잖아.
- 현
- 아니, 그 사람은… 여기서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오니.
- 준
- 난 상관없어. 결혼, 해도 돼.
- 현
- 무슨 소리야? 결혼을 왜 해? 그리고 그 아저씨 별로라며.
- 준
- 지금도 별로야.
- 현
- 근데 왜 결혼을 하래?
- 준
- 엄마가 좋아하니까.
- 현
- 네가 싫어하면 엄만 안 해.
- 준
- 해도 돼. (사이) 엄마 인생이잖아.
고양이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준, 다시 밖으로 나가려 한다.
- 현
- 어디 가?
- 준
- 고양이 찾으러.
- 현
- 고양이는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처음엔 무섭다며.
- 준
- 새끼가 태어났잖아.
- 현
- 새끼는 귀여워?
- 준
- (사이) 엄마랑 나 같잖아. 아빠도 모르고, 엄마만 따라다니니까.
현, 말없이 준을 바라보다 와락 끌어안는다. 준, 뻣뻣하게 있다가 쭈뼛쭈뼛 현을 안는다. 현은 팔을 풀고 준을 바라본다.
- 현
- 너, 내 아들 맞나 보다.
- 준
- 응?
- 현
- 열아홉살 때, 서울로 대학 가겠다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말리더라. 그래도 갔지만.
- 준
- 어땠어?
- 현
- 좋았어. 처음에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무섭더라.
- 준
- 왜?
- 현
- 너는 생겼지, 여전히 떠돌이 신세지. 앞날은 막막하지.
- 준
- 그래서 후회해?
- 현
- (사이) 아니.
현과 준, 서로를 바라보며 슬며시 웃는다.
- 현
- 갔다 와. 고양이 찾아야지.
- 준
- 그럴까?
준의 표정이 처음으로 환해진다. 겉옷을 집어 들고 빠르게 퇴장하는 준.
현은 벽면에 걸린 준의 사진들을 천천히 걸어가며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 현
- 내가 생명을 키우게 될 줄이야. 나는 그런 거 못할 줄 알았는데. 너 낳고, 이제 고양이들까지 생겨버렸네. 네 말이 맞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사이) 근데, 그래도 아프고 힘든 건 마찬가지더라. 내가 그랬거든. 남들은 한 곳에서도 잘만 사는데, 나는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이 모양으로 사나. 그런데 어쩌겠니. 이렇게 생겨먹은 걸. (사이) 안다, 이놈아. 너는 말려도 가겠지. 맨날 떠나기만 해서, 보내는 마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웃음) 엄마한테 내가 못할 짓 했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이제 늙어가나 보다. 너도 이제.. 다 컸나 보다.
현,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지도를 한 번 쓸어 보고는 소파에 털썩 앉는다. 멀리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조명 서서히 꺼진다.
- 호들갑 작가소개
-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했지만, 연극 수업으로의 외도를 일삼았다. 졸업 후 연극쟁이가 되고 싶어 무작정 대학로에 갔다. 창작자가 아닌 제작사 직원은 소모품처럼 느껴졌다. 없는 시간을 쪼개 어린이 뮤지컬 대본을 완성하자 때려칠 용기가 생겼다. 언젠가는 작가로 대학로에 귀환할 날을 그린다. 엔터테인먼트 창작그룹 화담에서 작가로 활동하며, 작품 속 현과 같이 지속 가능한 방랑질을 모색 중이다.